문화산책 배두순 시인
증거
늦가을 묘목 시장
검은 비닐로 발목을 동여맨 묘목들이
말라붙은 이파리 몇과 함께
종種을 증명하는 과실을 한두 개 달고 서 있다
확실한 증거다
본적지를 갈아타고 어디론가 이식될 묘목들
부지런한 주인을 만나면 숨소리 섞어가며
과수원의 자양분을 나눠 먹으며 함께 늙어갈 것이다
내가 낯선 가문에 이식되어
그리움조차 아껴먹으며 뿌리내렸듯이,
세상은 결코 진실한 곳도 아니고
인생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안 것도
그때였지만 딱히 뾰족한 묘수도 없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증거로 내놓으며 산다
좀 더 나은 증명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매번 헛수고일 때가 많다
몇 번의 장날을 들락거렸는지
물러터진 단감이 분홍빛 속살을 뭉텅뭉텅
내려놓기 시작한다
서녘 해도 심장이 터졌는지 붉은 핏물을
콸콸 쏟아내는 묘목 시장
증거들이 사라지고 있다
* * *
공갈빵
한참을 기다려
터질 듯이 부푼 공갈 몇 개를 산다
노릇노릇 잘 익은 허위의 복면을 사정없이 깨부수는데
아, 안쪽의 속 깊은 꿀맛에 혀가 먼저 녹는다
이런 같잖은 공갈에 속아 넘어가는
미각의 즐거움이라니,
공갈이란 이처럼 부풀리고 부풀어 올라야 제격이지
고작 노점의 공갈빵 앞에서도
공갈은커녕 큰 소리 한번 쳐보지 못한 삶이
한없이 무색해져서
애꿎은 공갈빵만 뜯어먹는다
공갈빵은 한 번도 공갈을 친 적이 없고
이름값 한 적도 없는데
언제나 공갈빵으로 불리는 존재감이 빵빵하다
공갈치지 않으면서도 노점을 먹여 살리는
착한 공갈빵
평택문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문학 교류위원
시집 『황금송아지』 외
세종도서 문학나눔 2회 선정
천강문학상 외 다수 수상
평택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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