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주변에 오랜 세월
사람들이 살아 온 서정리
평택의 5일장 두 번째 이야기 ‘서정리장’
덕암산과 부락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는 반지산과 둥구재봉에서 멈춘다. 그 아래로 완만하게 펼쳐진 서정리는 샘이 잘 나는 우물 주변으로 오랜 세월 사람들이 모여 살아온 곳이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며 서정리역이 생겼다. 1914년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올라가는 1번 국도가 서정리를 지나갔다. 같은 해 진위군 일탄, 송장, 여방면이 합해 송탄면이 되고 서정리에 면사무소가 앉는다. 청북 신포에서 오는 302지방도는 서정리를 거쳐 원곡과 용인으로 연결되었다.
소도읍 서정리엔 5일장이 생긴다. 5·10일의 평택장, 1·6일의 안중장, 그리고 서정리장은 2·7일에 열린다. 생긴 지 100년이 넘는 서정리장은 송탄면의 사람과 물산이 모이고 이웃 진위, 서탄, 고덕, 청북과 원곡, 남사의 장꾼들까지 모여드는 큰 장이었다.
옛날 서정리의 부자들
서정리엔 부자들이 있었다. 정미소를 운영했던 유인흥은 최고 부자였다. 유업을 이은 아들 유재호는 인근 장안동에서 큰 정미소를 운영한다. 그는 통합 평택의 문화원장을 했고 부친의 이름을 딴 ‘인흥장학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차석기는 서정리에서 영단(營團) 방앗간을 운영했던 옛날 부자였다.
‘마루보시’라 부르던 대한통운 영업소와 화성 정남에 정미소를 운영했던 이윤용은 국회의원을 한번 했던 재산가였다. 재산을 물려받은 그의 아들은 자투리땅으로 사용료를 받아내는 소송을 많이 했다.
조인구는 갈평과 서정리 인근에 땅이 많았다. 그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교회의 장로로 활동했다.
옛날 서정리의 요식업소들
서정리 파출소 옆에 있었던 송탄옥은 교환전화 끝번호인 25번집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5~6명의 여종업원들이 있었던 식당은 주방장을 두고 한식, 양식, 중식을 모두 차려내는 고급 요리집이었다. 그집 아들 심성구는 6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사람들이 신뢰했던 속 깊은 그는 오랫동안 동네일을 보았다.
송탄 농협 뒤편에 있었던 ‘태평관’은 안에서 윷도 놀던 창고처럼 생긴 건물이다. 저렴한 안주에 국밥과 막걸리 등을 주로 파는 서민들이 애용한 집이었다.
시장 공영주차장 자리에서 최원분이 운영했던 남진옥은 주문 위주로 술과 안주를 팔았던 주점이다. 남편 오종환은 상이용사였다.
중국집 쌍성원은 대만 화교인 임씨가 60년대 초부터 서정리에서 운영했다. 그후 동생 임장유에게 넘기고 자신은 송탄 구터미널 옆에 쌍흥원을 새로 냈다. 교환번호 뒷번호인 4번집으로도 불렸던 쌍흥원은 지금도 여성회관 근처에서 60년째 영업 중이다.
역전집은 박성태 부부가 서정리 역전에서 일으킨 평택에서도 유명한 보신탕집이었다. 한때 분점을 두는 등 호황을 누렸으나 아들 대에서 쇠퇴한다.
옛날 서정리장의 포장식당, 물장수, 나무장수, 큰 점포들
장날이면 닭전 빈터에 차일을 친 포장식당 4~5곳이 차려진다. 장꾼들에게 국밥과 국수, 막걸리를 팔았고 물을 써야하니 장날은 물장수가 바쁘다. 서두물우물과 서정우물에서 길어오는 물장수는 키 작은 최씨였고 물 한 지게에 5~10원씩을 받았다. 서정우물은 지금도 농협 후문 옆에 있고 이윤용의 기와집 터에 고층 건물이 들어서며 샘이 마른다. 서두물우물은 황순오의 집 마당에 있었다. 황순오는 그 집에서 나고 자란 서정리 토박이로 시의원을 했다.
장날은 아침 일찍 난전 공터에 나무장이 선다. 나무장수들은 동령의 이씨, 석정의 최씨, 장안리의 차씨들이었고 바수거리에 솔방울을 수북이 지고 나온 사람, 고주박이(나뭇등걸)로 장작을 패어 가지고 나온 사람, 솔가리를 새끼로 크게 묶은 나뭇동을 지고 나온 사람들이었다. 우마차에 예닐곱동을 싣고 나온 사람들은 큰 산을 가지고 있는 여유있는 사람들이었고 나무 한 동은 100~200원에 거래되었다.
유현칠·유현수 형제가 함께하던 형제상회는 제수용품과 건어물을 취급하던 큰 가게였다. 무학의 유현칠은 장사수완이 뛰어난 사람이다. 여름이면 삼베 정장을 차려입고 장항선 열차로 광천을 내려간다. 젓갈을 대량으로 매입하기 위함이다. 가을이 다가오면 그의 집 마당에는 새우젓 드럼통이 빼곡했다. 그는 서정리시장의 김장용 젓갈과 소금을 독점했다.
서정리 역앞 이규승의 동양상회와 길 건너편 한영수의 상신상회는 잡화도매업을 하는 동종업소였다. 자전거 배달원을 둔 두 업소는 경쟁적인 라이벌 관계다. 대가 바뀌어서도 경쟁했던 그들은 나중에 동양상회가 국도변으로 자리를 옮기며 경쟁이 마무리된다.
서정리의 명물들
서정리엔 특이한 행적의 명물들이 몇 명 있었다.
이청일은 연탄가게를 하던 춤솜씨가 도사급인 사람이다. 욕을 예사로 하고 성깔이 있어 강한 자에겐 사납기도 했지만 측은한 사람에겐 밥과 담배를 사주는 의리있는 건달이었다.
그에게 형이라 부르던 이청원은 버스운전을 하던 사람이다. 그 역시 입이 걸고 욕이라면 지지 않는다. 마침 인천에서 욕쟁이 대회가 열렸고 두 사람은 결승에서 맞붙는다. 최종승자는 모른다. 서로 이겼다고 우길뿐이다. (그런데 욕쟁이 대회가 있긴 있었나?)
‘을러구덕구’라 불리던 ‘진수’는 성은 없다. 그가 가끔 둥구재에서 깡통을 두드리거나 “덕구덕구을러구덕구” 소리지르며 하늘에 삿대질을 하고 다니면 사람들은 날 궂겠다며 빨래를 걷고 비설거지를 했다. 약간의 정신질환자인 그는 남에게 해를 주는 일은 없다. “진수 온다”하면 울던 아이를 그치게하는 효과는 있었다.
장날이면 권종록의 상포 앞엔 사과궤짝을 하나 놓고 도장 파는 이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은 모르고 그저 ‘천지조화’라 불렀다. 도장파는 기술이 뛰어났기에 웬만한 서정리 사람치고 그가 판 도장을 안가진 사람이 없다. 착하고 술 좋아했던 그는 어쩌다 막걸리 몇잔 대접 받으면 도장을 파서 꼭 사례를 했다.
역 근처엔 개구지고 까진 아이들이 꽤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빈 콜라캔에 맹물을 담아 한여름날 정차한 열차의 창문으로 선돈을 받고 맹물깡통을 건네준다. 열차는 금방 떠나고 녀석들은 유유히 사라진다. 지금은 중년이 넘었을 그네들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지역을 지켜온 서정리 토박이들
서정리엔 토박이가 많다. 그들은 나름 보수적인 정체성이 있다. 그래서인지 대개 역주변에서 기생하던 유곽이 이곳엔 발을 못붙였다. 별정직 중앙동장을 오래 했던 토박이 한인희는 경기중고등학교를 나온 수재였다. 그는 6남매의 맏이었고 고등학교 때 부친이 돌아가시며 진학을 포기한 채 내려온다. 그는 동네 어른들 권유로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을 위한 야학을 연다. 십여명의 지식 청년들과 함께였고 그는 영어를 맡았다. 첫 졸업생을 배출한 뒤 62년 군에 입대하며 야학은 침례교 재단에서 고등공민학교를 인가받아 은혜여중고의 모태가 된다.
78년 2월 동국대 학생회장 출신인 이준표와 그의 후배 이성희 등 젊은 청년들이 모여 ‘송암회’를 구성한다. 지역의 문화발전을 바랐던 그들은 이준표의 집 2층에서 어린 근로 청소년들을 위한 ‘송암야간학교’를 열었다. 이렇듯 서정리 토박이들은 나름 지역과 함께하는 열정이 있었다.
아카이브
얼마전 ‘작가의 시선 – 평택아카이브 전’이 있었다. 사진작가 이수연은 신장동, 지산동의 30년 기록 ‘쑥고개’를 전시했고 김윤오와 최치선은 50년 전과 현재의 기록인 ‘서정리’를 걸었다. 김윤오는 기록과 보전의 DNA가 뛰어난 사람이다. 보통 사람은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쳤을 소품과 기록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의 집 공간은 놀라움을 준다. 50년 넘은 서정리 사진들은 박물관에 보낸단다. 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인 최치선은 평택의 구석구석을 드론으로 몇 년째 기록 중이다. 희귀한 근현대의 모습들이 선교사나 미군들이 찍은 사진뿐인 기록에 박약했던 풍토, 그들의 열정은 그 황폐했던 땅에서 피어난 귀한 꽃들이다.
오래된 추억들은 세월의 흐름에 걸려져 푸른빛 노스탤지어(Nostalgia)로 남겨진다. 젊은 날의 추억이 신기루처럼 아름다운 이유다.
평택섶길해설사
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