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전 원정리 항공송유관 순찰 총대장 최 일 균 씨

보수꼴통이라 하는데 젊은사람 잣대로 우리를 보지마라

“젊은 사람들은 우리같은 늙은이들한테 ‘보수꼴통’이라고 하는데 그렇게는 보지마.”
혹시나 그렇게 바라보지나 않을까 미리 일러두는 말 일수도 있겠으나 염두해 두고 노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최일균옹. 칠순을 훌쩍넘긴 그는 올해로 76세다. 한때 그는 평택서부지역에서 꽤나 잘 나갔던(?) 직업을 가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중읍내에서 ‘도곡서실’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몇 명 안되는 또래 노인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서예학원 원장이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이듬해인 1962년부터 72년까지 11년간 그는 포승면 원정리에서 K-55미군기지까지 이어진 미군항공송유관을 지키는 일명 ‘파이프순경’이었다.

“당시에는 최고의 직업이었어. 한달 월급으로 보리쌀 다섯가마는 됐으니까 그보다 좋은 직업은 없었어. 처음에는 한 구간(약 1.2Km)을 지키는 단순 순찰직으로 들어 갔었는데 몇 년만에 50여명을 책임지는 총대장까지 했었거든.”

그가 파이프순경이 된 사연은 이렇다.

포승면 도곡리에서 15대째 살아온 그는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6명의 동생을 두고 군에 입대를 했다. 제대후 돌아와 보니 동생들 학비문제로 가정은 빚만 늘어 있었다. 농사 이외에 특별한 일거리를 찾지 못한 그는 마침 당숙댁에서 하숙하며 파이프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 일자리를 부탁했다. 이 일이 성사돼 그는 파이프 경비원이 되었다.

최일균씨의 증언에 따르면 항공유 송유관은 1950년대 후반에 설치되었으며, 지금의 해군2함대 사령부 남쪽끝에서 유류함이 정박해 육지로 퍼 올렸다고 한다.

군함에서 퍼올린 기름은 1차로 원정리 번제마을(미군은 이곳을 ‘계산’이라 불렀다) 근처에 있는 대형 기름탱크 8개소에 저장했으며, 길가에 설치한 6인치 송유관으로 K-55기지까지 기름을 수시로 보냈다고 한다.

궁안교에서 고덕면 방향 200미터 지점에 중간 경비초소가(지금의 해창리) 있었는데 미군은 이곳을 ‘진천’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송유관은 1972년에 포항-대구-대전-평택으로 이어지는 관로가 새로 만들어지면서 폐쇄되었다.

송유관 터지면 기름받느라 주민들 북새통

“기름유출사고가 많았는데 대부분 이음새 고무가 녹으면서 발생되었고, 간혹 주민들이 일부로 볼트를 살짝 열어놔 유출되기도 했어. 한번 터지면 기름줄기가 압력에 의해 수 십미터는 날아갔지.”

“당시에는 기름이 귀했고 또 서울에서 비싼 값으로 사가는 사람이 있어 내다팔기도 했어. 그래서 주민들이 몰래 볼트를 열어놓는거야. 기름이 터진 날에는 동네사람들이 양동이, 항아리, 오줌통 등등 암튼 담을수있는 그릇이라면 모조리 가지고 나와 퍼 담았어. 동네 잔치날이지.(웃음)”

송유관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미군은 원정리와 해창리를 포함해 6명 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주민들과 큰 사고없이 조용히 지내다 갔다고 한다.

“미군책임관 이임식때는 군청 공보담당에게 부탁해 군수명의로 감사장과 금반지 한돈을 해 서 보냈어. 진급때 고가점수에 반영되는 모양이야. 취임하는 책임관도 이것을 알고 주민들과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늘 조심했지.”

그는 과거 미군과 함께 근무해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미군기지 평택이전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다. 최근 미군기지이전에 따른 지역민들의 입장에 대해 “서로 화합해 잘 되길 바랄 뿐이다.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지…”라며 말을 아꼈다.

대화를 끝내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처음했던 말을 되풀이 했다.

“우리를 ‘보수꼴통’이라 하는데 그렇게는 보지마. 젊은 사람들의 잣대로 우리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도 기록이니까 잘 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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