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불교사암연합회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 축사
금요포럼 자문위원
오늘 봉축 법요 식장에 오면서 차 안에서 혼자 생각한 바를 공유하면 어떨까 합니다. 저는 세 가지 생각을 해보았어요. 첫째, 불교는 그저 단순히 하나의 종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문화적 토대라는 점입니다. 우리들의 할머님과 할아버님들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가르침과 의식(儀式)을 따랐습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기 전부터 부처님 전에 복을 빌었지요. <심청전>을 비롯한 여러 고소설에서도 주인공은 대개 부처님께 기도하여 얻은 자녀가 아니던가요. 전통 시대에는 인생의 중대한 위기를 맞이할 때도 그렇고, 특별히 경사스럽고 기쁜 일이 있을 때도 우리 조상님들은 절간을 찾았습니다. 불교는 유교와 함께 우리 한국인의 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었고,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는 가치관의 근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자신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누구나 알게 모르게 불교적 사유에 익숙합니다.
둘째, 우리 평택시의 불교는 세계와 우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입니다. 고대에는 주로 평택항(당시에는 대진포구)을 통해서 우리 조상님들이 그 시대 세계문화의 정수인 불교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중국을 거쳐서 평택으로 들어온 부처님의 광화(光華)는 다시 한반도 곳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원효 스님이 하필 평택(현재의 수도사)과 깊은 관계를 맺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고장 평택과 이곳의 불교계는 한국을 세계와 연결하는 중요한 경제, 문화적인 연결 고리가 될 것으로 믿고 기대합니다.
셋째로, 평택의 불교는 한국과 세계를 하나로 이어준 것은 물론이고, 불행히도 국제적인 분쟁이 일어날 때는 나라를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하였습니다. 알다시피 괴태곶 봉수대는 남쪽에서 쳐들어오는 왜적의 동향을 조정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봉수대가 수도사와 긴밀한 관계였다는 점은 여기서 길게 설명할 틈이 없습니다.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우리 평택의 스님들은 목숨을 내걸고 싸웠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적도 있었습니다. 13세기 초 세계제국인 몽골의 제2차 침략 때 적장인 살리타를 용인의 처인성에서 거꾸러뜨린 영웅은 과연 누구였던가요?
몽골 2차 침략 때 용인처인성에서
적장 거꾸러트리며 나라 구한 영웅은
평택 출신 스님 김윤후
평택불교 문화유산 수집정리 서둘러야
그는 다름 아닌 평택의 스님으로 장수의 역할을 자임한 김윤후란 분이셨습니다. 정확히 말해 오늘날 이충동에 있는 부락산 휴게소(과거의 백현원) 근처에 있는 어느 절간의 스님이셨습니다. 요컨대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신 수도사 적문 스님, 심복사 성일 스님, 만기사 덕조 스님 등은 다름 아니라, 고려 때 나라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한 김윤후 스님(유감스럽게도 법명은 망실됨)의 후예라 하겠습니다. 이렇듯 우리 평택의 불교계는 역사적으로 막중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현재와 미래에도 또한 그러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다 보니 저로서는 안타까운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민들은 김윤후 스님이 우리 평택 출신임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락산에는 스님을 기억하는 푯말 하나도 서 있지 않습니다. 우리 평택시와 불교계가 나서서 호국 불교의 상징인 승장(僧將) 김윤후를 기념하는 작은 사업이라도 시작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역사상 중요한 국방 유적이오, 수백 년간 사찰과 백성들의 정성과 노고가 깃든 괴태곶 봉수대를 시민의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유서 깊은 봉수대가 해군 제2함대의 철망에 갇혀 시민의 접근조차 불가능하게 된 지도 이제는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아울러, 우리 평택시민들이 잘 모르는 우리 고장의 불교 유물과 유적이 참으로 많은데요. 오늘을 계기로 평택시의 불교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여 시민과 더불어 공유하는 사업에 시동을 걸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불기 2566년 부처님 오신 날을 진심으로 봉축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