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뱃길 중 옥돌미 두물머리와 강세뚝

소금뱃길 중 외원앞뜰에서 고잔리로 넘어가는 홍원교에서 바라본 풍경
소금뱃길 중 외원앞뜰에서 고잔리로 넘어가는 홍원교에서 바라본 풍경

‘평택섶길’은 평택의 작은 길들이다. 16개 코스 오백리에 이르는 길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곁에, 호젓한 숲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유서 깊은 시내 골목과 재래시장에 이야기와 함께 짜여 있다. 섶길 여정에는 문화유산과 기념물, 역사 인물에 대한 테마들이 있다.
공직 은퇴 후 취미생활을 찾던 중 섶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필자는 평택에서 나고 자랐지만 섶길을 처음 걷는 날 곳곳에 숨어있는 경관이 놀라웠다.
그림 그리기에 약간의 소질이 있는 필자는 평택섶길 풍경을 펜화로 그려 간단한 글과 함께 평택시민신문에 한달에 한번 연재한다. 이번 연재를 통해 많은 분들이 섶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고장을 더 알게 됨은 물론 건강과 즐거움을 얻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소금뱃길은 원정리 수도사에서 청북 신포까지 남양호 상류쪽 물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다.
10월의 아침 호수는 밤새 차가워진 물이 따스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물안개를 피운다. 호수와 추수를 마친 넓은 들은 기러기,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쇠오리 등 철새들의 낙원이다.
홍원리 자오개에는 십여 만평의 큰 염전이 있었다. 지금의 햇살들농장 터다. 그곳 범구지 봉우리 아래엔 나루가 있었고 건너편 장안면을 왕래하며 안중장을 보는 상귀쪽 장꾼들을 실어날랐다. 장날이면 나루의 주막은 문전성시였다.
장안대교를 지나며 화성 향남과 청북 고잔뜰을 감아내려오는 발안천으로 갈라진다. 이곳은 바다였던 때 숭어, 농어, 강다리, 꽃게, 새우 등이 지천으로 잡히는 최고의 어장이었다. 특히 숭어떼가 몰려들 때면 거룻배로 후리그물을 돌리고 뭍에서 장정들이 양쪽 그물 끝을 끌어당길 때 오므라드는 그물 속에서 튀어오르는 숭어떼들은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이강세가 생전에 살던 99칸 집터
이강세가 생전에 살던 99칸 집터

부드럽고 매끄러운 경사진 갯벌은 아이들의 훌륭한 놀이터이기도 했다.
고잔4리 이장 한기원씨는 그곳 토박이로 중학시절 안중까지 20리 넘는 길을 걸어 다녔다. 고생스러웠지만 재미있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는 사람좋은 웃음과 입담으로 회고한다.
물길은 홍원교에서 또한번 갈라지는데 왼쪽은 신포쪽 광승천으로 올라가고 오른쪽은 학현리 하오개쪽으로 올라간다. 멀리 산마루가 펀펀한 곳이 무성산(武城山)이고 오른쪽으로 청북신도시가 보인다. 가운데 철탑이 있는 작은 봉우리께가 옥돌미다. 옥돌미는 바다쪽으로 내어민 땅이었다.
1904년생인 이강세는 평택지역에서도 첫손 꼽히는 자산가였다. 그는 고향인 덕우리에서 강습소를 열어 어린이 교육과 농민운동을 하며 매년 반복되는 풍수해와 한해로 고통 받는 농민들의 어려움을 보고 이를 해결하고자 간척사업을 결심한다. 1940년 사재로 24만원(백미 5000가마)를 마련하여 청북 옥돌미에서 포승 홍원리를 연결하는 2km의 바다막이 간척사업을 시작한다.
3년여의 사업은 예상치 못한 공사비와 백중사리의 거센 조수로 준공 단계에서 대청막이 둑이 터지며 실패하고 만다. 그는 1945년 8.15해방을 며칠 앞두고 마을 뒷산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그가 생전에 살던 자미산 자락의 덕우리 집은 그 후 주인이 바뀌었고 지금은 안채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행랑채는 중간채를 헐고 새로 지었고 비닐하우스와 마당자리엔 사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넓은 뒤란과 부속사들이 있는 큰 가대(家垈)는 옛날 99칸 집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강세뚝은 50년대 후반 홍원리 연백 피난민에 의해 마무리 되었다.

이계은평택섶길해설사​​​​​​​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이계은평택섶길해설사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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