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섶길’은 평택의 작은 길들이다. 16개 코스 오백리에 이르는 길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곁에, 호젓한 숲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유서 깊은 시내 골목과 재래시장에 이야기와 함께 짜여 있다. 섶길 여정에는 문화유산과 기념물, 역사 인물에 대한 테마들이 있다.
공직 은퇴 후 취미생활을 찾던 중 섶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필자는 평택에서 나고 자랐지만 섶길을 처음 걷는 날 곳곳에 숨어있는 경관이 놀라웠다.
그림 그리기에 약간의 소질이 있는 필자는 평택섶길 풍경을 펜화로 그려 간단한 글과 함께 평택시민신문에 한달에 한번 연재한다. 이번 연재를 통해 많은 분들이 섶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고장을 더 알게 됨은 물론 건강과 즐거움을 얻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원균길과 도일동 내리 원릉군 사우(祠宇)
임진왜란 선무1등공신 원릉군 원균 장군은 평택시 도일동 내리 출신이다. 선조 임금이 내린 선무1등공신 교서는 보물 제 1133호이다. 향토문화재 제6호인 사우(祠宇)는 장군의 묘역 인근 덕암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장군은 무과 급제 후 북방에서 여진족 토벌에 많은 공을 세우고 임진왜란 두 달 전 경상우수사에 임명된다. 왜란이 발발하자 전라 좌·우수사 이순신·이억기 장군과 함께 연합함대를 구축해 열다섯 번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임란 최초의 승첩인 옥포해전은 원균의 경상도 수군이 선봉에 서서 조선 수군의 사기를 크게 높인 전투였다.
조정의 부산진격 명령을 거부하여 임금의 미움을 산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게 되자 후임 통제사에 원균이 임명된다. 그 역시 부산 진격 명령의 압박을 받게 된다.
한산도 통제영에서 부산까지는 70km로 조선의 판옥선들이 하루에 가기 힘든 거리였다. 가더라도 전투를 마치고 밤이 되기 전에 돌아오거나 어두워지면 육지에 정박을 해야 했는데, 오가는 길목인 경상도 남해안 일대는 요소마다 20여개의 왜성을 쌓아 놓은 왜군에게 완전히 장악된 상황이었다. 뻔한 죽음의 길이었기에 이순신장군도 진격 명령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원균 장군은 육군과 수군의 합동진격을 주장하지만 묵살되고 오로지 수군 홀로 나가도록 압박 받는다. 전장의 사정을 모르는 조정의 탁상결정은 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에게 수군의 지휘권을 주어 권율은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치기에 이르고 질 수 밖에 없는 전투에 내몰린다.
결국은 칠천량에서 패하며 장군은 전사한다. 이억기·최호 수사와 친동생 원전 등 수많은 병사들이 함께였다.
무리한 출전을 강요한 자들과 전투 중 도망하여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해야겠기에 죽은 원균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또 갖은 말을 지어 정쟁과 치졸한 이해 다툼에 이용하여 죽은 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한 일은 최근 들어 냉철한 역사인식에 의해 이순신은 분명 치밀한 전략의 존경 받을 지장(智將)이었고, 원균 또한 항상 두려움 없이 앞서나가 싸우는 용장(勇將)이었으며 두 사람 모두 바다를 지키기 위해 고민하다 나라를 위해 죽었다는 지극히 명백한 사실이 점차 조명되고 있는 일이다.
사당 오른쪽은 원주원문(原州元門)의 정문(旌門)인데 공훈자가 18명이다. 그중 원균의 아들 원사웅, 친동생인 의병장 원연, 종사관 원전 등이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가문 전체가 나라의 위기 앞에서 목숨 바쳐 싸우며 지도층의 의무를 다한 것이다.
8월 22일 (음력 7월 15일)은 장군의 425주기다. 사우 뒤편의 숲이 푸르르고 8월 하늘엔 뭉게구름이 피어 오른다.
평택섶길해설사
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