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척박한 땅이었던 평택
서로 함께 일하며 발달했던
두레 정신이 사회복지의 맹아
짠물의 대지에 모인 민초의 삶에서
평택사회복지 싹 터
평택의 사회복지사를 총망라한 <평택복지발전 70년사>가 평택시사회복지협의회 20주년을 기념해 발간됐다. 70년을 거슬러 올라가니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그리고 전쟁으로 가족과 집을 잃은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이 사회복지시설의 시초였다.
집필위원장인 김주영(60) 한국복지대 교수는 1년여 동안 70년사 발간에 공을 들였다. 이 과정에서 도출해낸 평택복지의 뿌리는 함께 일하는 ‘두레’와 어려울 때 서로 돕는 ‘환난상휼(患難相恤)’ 정신이다. 김 교수는 “평택은 척박한 지리·환경적 여건으로 오랜기간 빈곤과 수모의 역사를 이어왔다”며 “잘난 사람도 없고 모두가 어려운 처지다 보니 두레·환난상휼 정신이 자생적으로 성장· 발달했고 이것이 평택 사회복지의 맹아가 됐다”고 평가했다.
평택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는지
2002년 한국복지대에 부임하면서부터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출퇴근하다가 2015년에 평택에 정착했다. 고향은 충주다.
평택사회복지협의회(평사협)를 오랜기간 후원했다 들었는데
사실 평사협을 알지 못했다. 낯가림이 심해서 지역사회에 얼굴을 비칠 생각도 못했다. 2013년 평택대에서 ‘폴 포츠 내한공연’을 해 가보니 평사협이 주최하는 행사였다. 행사장에서 후원을 해달라 하길래 ‘이런 멋진 공연도 봤는데…’ 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후원하게 됐다. CMS로 수년간 꼬박꼬박 후원만 하니 평사협에서 누군지 궁금했던 듯싶다. 연락이 와서 만났고 한국복지대 교수라고 하니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며 일을 시켰다. 지난해 이영태 평사협 회장이 취임하면서 교육분과위원장을 맡게 됐다.
<70년사>가 400쪽이 넘는다. 이런 방대한 양을 발간하기가 쉽지 않았을 듯 싶다
2020년 평사협 20주년에 맞춰 발간하려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1년 늦춰졌다. <70년사>는 평사협 10주년에 맞춰 발간된 <평택복지발전 60년사>에 그 뒤 역사를 더하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발간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대 변화에 맞춰 정신보건·자원봉사·근로연계복지 등이 새롭게 추가됐고 평택사회복지 1세대인 유재춘 목사와 김학주 평사협 초대 회장의 기억도 담아냈다. 지금은 작고한 유재춘 목사는 평생을 성육보육원 원장으로 ‘고아들의 어머니’로 살았던 분이다. 또 지난해 연 평사협 창립 20주년 기념포럼의 내용을 간추려 실었다.
사실 집필위원장이라고 해도 큰일을 한 건 아니다. 앞의 개관을 쓰고 원고를 손보는 정도였다. 각 복지 분야는 집필위원들이 쓰셨다. 이분들은 복지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이고 원래 글 쓰는 분들이 아니다 보니 집필할 내용과 방향의 틀을 잡는 데 도움을 드렸다.
평사협 주최 ‘평택사회복지역사 알아보기’ 특강에서 평택을 ‘짠물의 대지에 모인 민초들의 고장’이라고 정의했다. 사회복지와 민초의 연관성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평택 역사를 살펴보면 예전 평택땅은 척박했다. 갈수기 밀물 때문에 염해를 입고, 비가 많이 오면 홍수가 났다. 농사 짓기 어려운 땅이다 보니 권력을 가진 사족(士族)도 없었다. 가진 것 없고 살기 어려운 민초들이 척박한 땅에 자리 잡고 강인하게 살아온 곳이 바로 평택이다.
지금의 평택이 있기까지 간척을 빼놓을 수 없다. 조선시대 팽성읍 지역은 우리나라 최대 갯벌이었다. 당시 이곳을 간척해 대규모 농토를 만드는 사업이 시작됐고 일제강점기에는 공물을 공출하기 위한 간척이 이어졌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1.4후퇴 때 내려와 남한에 흩어져 살던 북한 주민들을 안성천 일대로 이주시킨 다음 3년 동안 먹을 쌀을 주고 간척하게 했다. 죽어라 옥토로 만들었더니 팽성읍 대추리 등에서 주민들이 쫓겨났다. 이후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건립되면서 어마어마한 땅이 생겨났다. 이런 간척 사업은 혼자서 결코 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 함께 일해야 하니 두레 정신이 발달했다. 죽어라 간척해 놓으면 이 땅을 권력자들에게 빼앗기는 수탈이 거듭되다 보니 사람들은 똘똘 뭉치게 됐고 어려울 때 서로 돕는 환난상휼이 자생적으로 발달했다. 두레와 환난상휼을 오늘날 평택사회복지의 맹아라 볼 수 있다.
간척과 수탈, 이주 과정이 거듭되다 보면 기존 주민과 이주민과의 갈등이 심했을 것으로 본다.
신기하게도 평택은 외지인에 대한 ‘텃세’가 가장 적은 지역이었다. 잘난 사람도 없고 모두 어려운 처지다 보니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외지인을 품었다. 한 사람의 손이라도 더 필요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기도 했고. 그래선지 정부에서 수차례 외지인을 이주시켰는데 큰 갈등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갈등은 1995년 3개 시·군 통합 이후 생겨났다. 조사해 보니 다른 행정구역이라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지도를 보면 3개 지역이 큰 하천을 경계로 분리돼 있고 삼국시대부터 각기 다른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다. 원래 평택이었던 팽성읍은 충청남도가, 북부지역인 진위현은 청주가 각각 다스렸고 서부지역인 안중·포승지역은 수원 관할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수탈하기 편하게 부·군·면 통폐합을 통해 다른 영향권에 있던 지역을 합하면서 갈등의 씨앗을 심은 것으로 본다.
평택 복지시설의 시초는 6.25전쟁 후 생겨난 보육원으로 알고 있다.
참으로 슬프게 시작됐다. 보육원에서 전쟁으로 부모와 집을 잃은 아이들을 키워냈다. 1980년대 들어 어엿한 시설을 갖춘 동방과 에바다복지회를 설립해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과 여성들 그리고 장애인들 교육까지 시작했다. 1981년 평택대학교에 사회복지학과가 개설되면서 전문 교육을 받은 사회복지인력이 배출됐고 1990년대 종합사회복지관이 들어서 민간이 추진하던 많은 복지사업들이 공공기관과 협력하면서 탄력을 받게 됐다. 2001년에는 ‘평택사회복지협의회가’가 창립돼 지역복지 증진과 발전에 기여해왔다.
기지촌할머니 복지는 평택복지의 과제
슬프고 아픈 역사라도 부정해선 안 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미래로 나갈 수 있어
앞으로 평택복지 과제를 꼽자면
기지촌 할머니들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그들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평택과 평택사람들은 기지촌 때문에 ‘우리가 욕 먹는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곳으로 매도된다’는 피해의식이 깊다. 그러다 보니 기지촌 여성에 대한 인권적·복지적 접근을 하기보다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들에게 도덕적·윤리적 비난을 가한다.
이제는 헐벗고 가난했던 시절에 미군을 바라보았던 시각과 달라져야 한다. 국제적인 시각으로 바꿀 때가 됐다. 슬프고 아픈 역사라 해도 무시하거나 부정해선 안 된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기성세대가 과거의 굴레를 끊지 못해 평택에서 성장하는 청소년들에게 물려줘선 안 된다고 본다.
이제 60~70년대 가족을 위해 희생했다가 끝내 가족에게 버림받았던 기지촌 할머니들을 더 이상 등한히 하지 말고 이들을 위한 복지를 실천해야 한다.
앞으로도 평택에 머물 계획인지
살다 보니 평택에 정이 들고 평택이 사랑스러워졌다. 다양한 나라의 외국인을 만날 수 있는 역동적인 곳이라 흥미롭다. 단국대학교에서 특수교육을 공부한 이후 평생을 장애인복지를 연구해왔고 현재 가장 큰 관심사는 장애인 평생교육이다. 가능하다면 평택에서 장애인 평생교육을 연구하고 실천하고 싶은 맘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