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많은 인명피해 초래하고도
교훈 못얻는 현실 안타까워
사고 공화국 오명 벗기 위해선
타성과 매너리즘 극복해야
수필가 · 시조시인
전 고등학교 국어교사
누군가에게 세상에서 가장 나쁜 해충이 무엇인 줄 아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돌아온 답은 ‘대충’이었다. 순간 이따금 아재 개그를 즐기는 나로서는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적당주의를 재밌게 꼬집은 일갈이었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글자 그대로 대충(大蟲)이야말로 제일 피해가 클 수밖에 없지 않냐고 덧붙이니 그도 따라 웃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는 사건 사고만 하더라도 대부분은 적당주의에 기인한다. 가령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작업장 사고사, 공사장 추락사, 하수구 질식사 등이 그것이다. 고 김용균 청년의 죽음을 뼈아프게 겪고도 해당 기업의 전횡을 막자는 법제화는 차일피일 굼떴고, 뒤늦게 국회를 통과한 이른바 ‘김용균 방지법’ 또한 여전히 관련 법조항은 경영자를 처벌하는 데는 미흡하다. 왜 우리 사회는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과감히 버리지 못할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안전대비 미비로 인한 위험천만한 경우의 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온 관행으로 빚어지는 일들이다.
빈발하는 사건 가운데 음주운전을 감행하다 일으키는 무개념 부류와 무심코 무단횡단을 일삼다 당하는 자동차 사고를 들 수 있다. 여기에 ‘하인리히 법칙’을 적용해 보면 그 실상은 쉽게 드러난다. 큰 재앙을 당하기 전 평균적으로 300번의 조짐이 있고, 29번의 아찔한 경험을 무시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어놓은 건 오래전 일이었다. 1931년 당시 미국 여행보험사의 손실통제 부서에 근무하던 하인리히(H. W. Heinrich)는 산업 재해 사례들을 분석하던 중 일정한 흐름을 <산업 재해 예방: 과학적 접근>을 통해 처음 알렸는데, 어떤 재해든지 여러 번에 걸쳐 경고등이 켜진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밝혀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퍽 크다고 하겠다.
그 폐해가 얼마나 크면 신조어처럼 나도는 유사어도 여럿이다. 그저 귀찮다고 대충 넘겨버리는 ‘귀차니즘’을 비롯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괜차니즘’도 모자라 그래도 뭘 좀 철저히 하려고 하면 사람이 대범하질 못하다고 핀잔을 주며 ‘쪼자니즘’으로 몰아가기 일쑤다. 따지고 보면 적당한 익숙함이 주는 타성에 젖은 채 하루하루를 반복하는 일상이 그 원인이다. 이 또한 연원을 보니 1520년경부터 1600년경까지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나타난 문화 현상이었다. 특히 미술 영역에서 보편적인 용어로 쓰이다가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무기력하게 ‘틀에 박힌 태도나 방식’이라는 뜻으로 일반화한 매너리즘(mannerism)의 일종으로 파악한다.
온정주의에 얽매여 3진 아웃을 도입한 의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스토킹 범죄 등 금지할 일이라면 단번에 끊어내야 마땅하거늘 처음이니 눈감고 삼세 번이니 봐준다는 식의 일 처리로 인해 왜 선량한 다수의 시민이 크고 작은 피해와 슬픔을 당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 거리를 걷다 보면 보도블록 기울기 하나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매끄러운 노면과 부드러운 맨홀의 불일치는 물론 보이지 않는 구석의 마무리까지 정교한 시공을 좀체 찾기 힘든 것도 노동자와 감독자의 공동책임이라고 본다. 흡연 후 담배꽁초 투기도 마찬가지다. 실화나 지하철 환기구를 막아 수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하고서도 교훈을 얻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토로다.
사고 공화국의 오명을 벗기 위한 개인적 진단론을 펼치면서 차제에 우선순위가 뒤바뀐 경우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불과 1년 전 민원 전화번호를 찾으려다 배치된 공무원 부서 현황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각 언론사 별로 배당한 직원의 수를 세어보니 무려 100명이 넘었다. 반면에 평소 녹색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필자로서는 400개소에 가까운 평택시 전 지역 공원(소공원 포함)을 관리하는 담당자가 고작 7명에 불과하다는 호소를 듣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지만 거꾸로 디테일로 승부를 걸면 악마를 이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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