섶길 걷는 동안 고달팠지만 행복
때묻지 않은 자연과 잊혀진 역사
되살리고, 살아 숨쉬는 향토 문화와
땀내나는 사람 만난 소중한 시간들
앞으로도 콧노래 흥얼대며 걸을 참
해마다 하얀 배꽃 은빛 물결 이뤄
오늘은 오백리 평택섶길 여행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날. 오랜만에 하늘은 갰고 삼십여 동호인의 표정은 밝았다. 원균장군묘에서 평택시청 앞 섶길 기점까지 약 15km 거리를 5시간에 걸쳐 걷는다. 마을길, 논밭길, 숲속길, 배밭길, 시내길을 두루 지나가지만 평택의 특산물인 배 과수원이 절반이나 이어져 이름을 ‘과수원길’로 붙였다.
해마다 사월이면 하얀 배꽃이 은빛 물결을 이루는 줄 알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게 우리네 속사정. 출발하기 전 그간 길도우미를 도맡다시피 한 한도숙씨의 개괄적인 해설이 있었다. 예로부터 덕암산 자락에는 아흔아홉 골짜기마다 자리를 잡은 마을이 생겼는데 살만한 땅이 된 지는 구한말 이후. 대대적인 간척사업 끝에 갯벌을 평야 지대로 바꿔 기름진 쌀농사가 대세를 이뤘다는 얘기였다. 굳이 이중환의 <택리지>를 들추지 않더라도 상전벽해가 따로 없는 형국이 되었다.
덧붙여 부락산의 지형은 이른바 와휴형(蛙休形). 그래선지 사람들은 개구리가 네 다리를 펼치듯 별다른 욕심 없이 부른 배를 두드리며 살아왔단다. 그 탓에 인재가 나오지 않았다는데 그러고 보니 평택을 대표하는 큰 인물이 없는 연유를 알 성싶었다.
삼성교를 건너자마자 펼쳐진 밭뙈기. 코끝에 스치는 들깻잎 냄새가 유난히 향긋했다. 사납고 질긴 비바람을 견뎌낸 농작물을 향해 엄지척! 좁은 시골길에서 대형트럭을 피해 걷자니 방치한 농기계들이 눈에 밟혔다. 자가용 세차에는 그토록 공을 들이면서도 고가의 트랙터는 녹이 슬도록 내버려 둔다면 문제의식의 결여일 수밖에. 곧바로 만난 팔용지. 연꽃은 벌써 졌으나 이파리는 더욱 싱싱했다. 잡초가 무성한 택지조성지를 거쳐 접어든 팔용산 숲길. 오가는 발길이 드문 데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산속으로 자연을 배우러 나온 유치원생들과 눈인사를 나눈 뒤 마주친 원곡초등학교. 한눈에 알록달록한 건물 색상이며 아기자기한 시설물이 보기 좋았다. 하지만 급격한 인구감소로 인해 학령기 아동의 숫자가 폐교를 걱정할 만큼 심각한 지경이라면 큰일이다. 외가천교 위에서 바라본 원곡천 풍경. 깨끗한 물길은 물론 나풀거리는 물풀을 대하니 퍽 싱그러웠다. 원곡면사무소에 조성한 3.1독립항쟁지. 만세광장에 세운 동상들을 보며 느낀 바는 여기가 백 년 전 일제에 항거한 진원지건 아니건 왜인들의 폭압에 한마음 한뜻으로 맞섰다는 점이다. 놀라운 건 기미독립선언서에 새겨진 대로 다들 비폭력을 견지한 마당에 이곳만은 유일하게 실질적인 저항을 선택한 지점. 다만 연약한 사람인지라 그 와중에 내 편만 살자고 저지른 고자질은 옥에 티로 뭇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때 앞장섰던 일부 인사들의 변절은 뼈아픈 대목이다.
길마다 만난 꽃송이 행복 안겨줘
노련한 남기범씨의 도움으로 건널목을 건너 얼마큼 논밭길을 안고 가니 굴다리. 경부고속국도와 나란히 걷는 독특한 체험은 무척 흥미로웠다. 몰라보게 맑아진 대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앞다퉈 매연을 뿜어대는 고속도로를 끼고 심호흡하리란 걸 누군들 상상이나 했으랴. 이구동성 코로나바이러스를 원망하지만 인류를 향해 경고장을 내민 지구환경의 역설에 주목할 때다.
월곡동 마을회관을 앞에 두고 마주한 정려문. 이씨 할머니의 효행을 알리는 기림비였다. 동네 한가운데 활짝 피어난 빨간 칸나꽃 한 송이가 마치 그분을 상징하듯 곱디고왔다. 담장 밑에 줄지어 늘어선 민들레 군락. 불사신이란 꽃말처럼 언제 봐도 끈질긴 민초를 보는 듯하다. 곧이어 난초를 빼닮은 맥문동 줄기에서 돋아난 자줏빛 꽃 대롱은 푸근한 감이 든다. 이 모두는 섶길을 걸을 때마다 만나는 꽃송이가 안겨주는 행복감이다.
이름 모를 토막다리를 지나 이어지는 농로. 누군가 죽백동(竹柏洞)이라 일렀다. 당연히 대숲 골이거니 했더니 죽죽 뻗은 대나무처럼 곧게 자란 측백나무(柏)가 지천인 데서 유래했단다. 이윽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배밭길. 수더분한 표지석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이채로운 건 과수원에 울타리가 없다는 사실. 요즘 세상에 웬일인가 묻자 담장을 치는 수고보다는 차라리 적선이 낫다는 게 담백한 농심이란다. 응당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을 증명한 현장이랄까. 아니나 다를까 두 달 가까이 퍼부은 장맛비와 심술궂은 태풍의 역습에도 불구하고 튼실한 배가 주렁주렁 무르익어갔다. 간간이 길가에 굴러다니는 배를 주워 덥석 깨물어보는 이들도 보였다. 설명을 듣자니 배는 꽃잎이 5개에 씨는 10개란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연간 45만 톤을 수확했지만 지금은 반 토막이 난 상태. 값이 비싸 반 이상이 제수용으로 나간다는데 워낙 수출물량이 미미해 판로를 개척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가는 셈이다.
솟대를 좇아 걷다가 아늑한 오솔길로 빠지나 싶을 때 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널찍한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다. 아내의 제안으로 마련한 푸짐한 샌드위치. 때늦은 오찬을 즐기는 동안 한도숙씨가 넘겨준 마이크를 잡고 예정에 없던 개인사를 고하는 순서를 가졌다. 우리 부부가 참여한 동인을 비롯해 후일담을 글로 엮는 이유와 교직을 퇴임한 이후의 삶을 진솔하게 되짚은 시간이었다.
높은 담장을 치고 굉음을 내는 공사현장. 가로세로를 가리지 않고 들어선 주택가에 난립한 상가들을 보며 느끼는 오감을 표현하면 천박한 도시 경관쯤으로 응축할 수 있다. 왜 우리는 유럽처럼 지붕을 예쁘게 꾸미고 벽돌 색깔을 맞춰 그림 같은 통일감을 만들어내지 못할까? 농촌이든 어촌이든 제멋대로 지은 집들로 인해 찾아가고픈 풍광이 급속히 사라져가기에 안타까워 던지는 화두다. 돌비처럼 우뚝 선 기남방송 팻말을 뒤로하고 딱딱한 포장길을 벗어나자 세 갈래길. 아쉽게도 섶길 화살표는 없었다. 저만치 앞서가다 돌아선 발길을 위무한 건 도심 속 숲길. 빼곡한 나무 틈새로 보이는 아파트단지를 스치듯 빠져나오니 배다리생태공원이었다. 바로 옆 도서관은 평택의 품격을 한껏 높였고 편안한 산책길은 공원의 전형을 선보였다. 철새 관찰대가 뵈는 곳에서 마지막 해설. 한도숙씨의 혀에는 힘이 있었다. 뜬금없는 홍살문에 웬 배다리냐는 의문을 풀어내는 사이 뇌리엔 자꾸만 달 밝은 밤 들판을 내달리는 배달민족의 동영상이 첫 번째 대추리길에서 듣던 설명과 여러 겹 겹쳐 보였다. 정교한 생태 육교 위를 넘거나 다른 데 비해 두세 배나 넓은 보도를 밟거나 이건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한결 맑아진 통복천을 따라 산책로를 걷다 보면 악취를 맡던 때가 떠오른다. 그와 동시에 물 위를 떠다니는 오리 한 쌍을 보노라면 금세 향취가 몰려온다. 이같이 맘먹고 하면 얼마든지 해내는 일을 제대로 못하니 한창 건설 중인 고덕국제신도시가 그 모양인 터. 민선시장 이하 모든 공무원들은 제발 각성하고 부지런히 발로 뛰며 미래지향적인 도시건설에 매진해주길 바란다. 이야말로 섶길을 걸으며 샘솟는 평택 사랑의 발로이자 피력. 덤처럼 새로 알게 된 지명은 가벼운 부록이라도 펴낼 만치 쌓였다.
총 열여섯 개 코스를 돌며 우리는 말했다. 섶길이란 쉬엄쉬엄 돌아가는 길이라고! 지난 7개월 반, 평택섶길을 걷는 동안 때로는 고달팠으나 내내 행복하고 감사했다.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잊어버린 역사를 되살려내어 뜻깊었고, 살아 숨 쉬는 향토문화와 땀내 나는 사람들을 맘껏 만날 수 있었으니까. 먼지 낀 도심을 벗어나 틈만 나면 두루마기든 저고리든 깃 아래 달린 긴 헝겊 조각처럼 이어진 길을 따라 콧노래를 흥얼대며 정서적 즐거움을 공유하는 시공을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걸을 참이다. <끝>
고등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 시조집, 기행집 등을 펴냈다.
퇴임 이후 기고 활동과 더불어
교육철학 박사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이충동에 살고 있다.
조하식 작가의 평택 섶길 연재는 이번호를 끝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