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봉산 주변 진위현 역사문화 체험 8km 둘레길
동천리 가곡리 거쳐 무봉산 정상 도착
208미터 봉우리라 믿기지 않을 가파른 길
하산길엔 만기사와 무봉산청소년수련원 지나
진위면사무소에서 출발해 ‘무봉산둘레길’ 돌아오기.
무봉산(舞鳳山)은 산세가 춤추는 봉황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네 골목길을 거쳐 아담한 원각사(圓覺寺)를 지나치니 막바로 숲길. 과연 삼림욕을 위한 자연휴양림에 걸맞게 싱싱한 소나무들로 빼곡하다. 비록 그늘진 산길이라고는 하나 한여름 무더위와 싸우는 고행을 각오해야 한다. 능선 아래 지난주에 걸은 아곡마을이 빼꼼히 보였다. 당고개에 자리한 성황당을 지나자마자 제법 비탈진 너덜길. 긴 장마에 군데군데 파이긴 했어도 잘 견뎌준 등산로가 대견하다. 지표면을 붙잡고 있는 소나무 뿌리 덕분이었다.
초장부터 들려오는 가쁜 숨소리. 나는 지레 이보다 높은 데는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나 역시 아내와 함께 간간이 즐기는 산행길이건만 왠지 오늘따라 다소 힘겨웠다. 보폭에 맞지 않는 계단을 오를 때는 피로감은 갑절로 치솟는다. 치달아 오른 지점에서 가진 휴식 시간. 요즘 들어 수분을 그리 자주 보충한 적은 없었다.
얼마큼 걷자 경사지에 번듯하게 조성한 분묘군. 일행 중 한 분이 자신의 외조부 묘소라고 전했다. 길도우미 없이 나타난 갈림길. 길눈에 밝은 이마저 동나버려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긴가민가 접어든 내리막길에서 만난 안동권씨 문중묘. 한편에 납골당을 두고 있었다. 지도를 펴니 잘못 든 길. 잔돌과 나뭇가지를 이용해 진창길을 가까스로 벗어나니 곧 마을길이었다.
동천리(東泉里) 버스정류장. 땅밑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 동편 논밭들이 풍작을 이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거기서 이 동네를 지키는 노익장을 뵈었다. 내일모레 팔순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치 활력 넘치는 동안이다. 조금 더 가자 산기슭에 경주이씨 문중묘와 재실이 나왔다. 가곡마을을 형성한 다섯 성씨가 여의주를 향하여 모여든다는 오룡쟁주형(五龍爭珠形) 지세를 십분 활용한 터. 물론 필자는 풍수지리적 해설을 꿈보다 해몽이라는 차원으로 이해하되 서로 간에 선한 영향을 미치며 상승을 극대화한 결과라고 진단한다. 심은 대로 거두는 건 만고의 진리니까.
체력에 한계를 느낀 몇 분을 남겨둔 채 향한 무봉산정. 중간에 하얀 독버섯들이 자란다 했더니 여기저기 불탄 자국이 역력했다. 다행히 굴참나무를 비롯해 리기다소나무들이 꿋꿋이 살아남은 게 기적인 상태. 하위수종인 신갈나무 말고는 온통 시커멓게 그을린 산중턱이 무척이나 볼썽사나웠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선 안 될 끔찍한 일 가운데 방화와 실화를 들 수 있다. 2/3 이상이 산지인 국토를 불태우면 우리네 삶도 더불어 무너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린벨트로 묶은 지역은 함부로 풀어선 곤란하다. 사유지라면 적법절차에 따라 공유지를 늘리는 게 미래지향적이라고 본다. 잠시 멈춰 이런저런 생각을 나누다 급히 걸음을 떼니 금세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이마에 두른 손수건에서 땀방울이 물방울이 돼 뚝뚝 떨어진다. 천신만고 끝에 오른 무봉산 정상. 해발 208m밖에 안 되는 봉우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가팔랐다.
물을 나눠 마시며 한숨 돌리고 있을 때 부르는 이가 있었다. 꼭대기를 정성껏 가꾼 어르신이 계셨다. 사비를 들여 손수 잔디를 날라 살리고 화단처럼 무궁화동산을 꾸몄다. 문제는 이토록 아름다운 손길에 몹쓸 짓을 일삼는 무리. 아무 데나 대소변을 보고 애써 심은 고추며 들깻잎을 마구 따가는 작태에 몹시 분개하셨다. 공유 가치에 손대는 버르장머리도 그렇거니와 향토를 돌보며 보람을 찾는 고운 맘씨에 상처를 내는 심술은 무얼까? 정중히 존함을 여쭈니 ‘양윤석’이라 선뜻 이르셨다.
이제는 하산길. 그런데 웬걸, 또다시 왔던 길목을 되돌아가는 바람에 버겁기는 했어도 만기사(萬奇寺)에 들러 목을 축여 좋았고, 산자락에 희망이 피어나는 평택시무봉산청소년수련원이 있어 위안이 되었다. 새삼 극기훈련의 체험을 되새긴 섶길 걷기였다.
고등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 시조집, 기행집 등을 펴냈다. 퇴임 이후 기고 활동과 더불어 교육철학 박사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이충동에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