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공동체를 품은 ‘시민적 민족주의’ 양성 필요

평택에서 50년 이상 살며 서울로 20년간 출퇴근해 

[평택시민신문] 우리나라가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외국인들이 입국하고 있다. 이제는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외국인이 넘쳐난다. 
길강묵(53) 전 몽골 영사는 이러한 격변을 온몸으로 느낀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이민정책연구원 기획조정실장으로 이민정책을 연구하다 마흔에 법무부 특채로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이민정책 업무를 담당해왔다. 2016~2017년 법무부 외국인정책과장을 맡아 우리나라 이민정책을 집행했으며 2017~2020년 몽골 영사 시절에는 폭주하는 몽골인들의 한국 비자 요구를 관리하고 심사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지난해 9월부터는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 총무과장으로 외국인 출입국을 총괄하고 있다. 
길강묵 전 영사를 만나 우리나라 이민정책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우리나라와 몽골의 상호 발전방안에 관해 들어보았다. 

 

주몽골한국대사관에 영사부를 총괄하는 영사로 근무했다

통상 대사관에서는 외교부를 비롯한 중앙부처의 외교관들이 해당 부처의 업무를 담당한다. 비자 발급은 법무부 업무이고 비자 종류가 180개나 되기 때문에 전문성이 요구된다. 국내로 입국하려는 사람이 많은 몽골, 태국 등의 나라는 주로 법무부에서 영사를 파견한다. 이른바 비자영사로 어떠한 외국인을 국경을 넘어 국내에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어떤 외국인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선별하는 것이 바로 이민정책의 첫 단계다.

 

2017년부터 우리나라로 입국하는 몽골인들이 크게 늘었다고 들었다

2017년 8월 몽골에 영사로 부임했는데 2년 반 동안 밤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다. 비자 신청이 하루 평균 1000건이 넘게 쏟아졌다. 두툼한 서류를 검토는 데 1분을 잡아도 16시간이 넘게 걸린다. 사인만 해도 8시간 근무란 불가능했다.

이처럼 비자 발급 업무가 늘어난 것은 2017년 몽골에 IMF 경제위기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비자 신청 건수가 2배 이상 급증해 한국 비자를 발급하는 데 3개월이 걸렸다. 아무리 야근을 해도 업무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인원 충원 등의 대책을 건의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알고 싶다

문제를 문제로서 해결했다. 몽골대사관에서 비자 발급을 담당하는 직원들에게 하루 8시간만 근무하게 했다. 그랬더니 비자 발급 기간이 6개월로 늘고 몽골에서 난리가 났다. 결국 몽골 총리가 당시 이낙연 총리에게 비자 발급 기간을 줄일 대책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고, 법무부·외교부가 비자 발급이 늦어지는 이유를 조사하는 감사까지 벌였다. 감사에서 비자 발급 현황, 인원 증원의 근거 등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했더니 그제야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한 정부가 비자 업무를 담당할 영사와 직원 수를 늘리고 비자센터도 만들었다.

 

몽골 영사 시절 수천명의 불법 브로커를 형사고발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정의롭지 않다. 어느 나라든 경제적으로 고달픈 사람들이 이민을 계획한다. 이런 사람들이 어렵게 마련한 돈을 갈취해 불법 브로커들이 호화스럽게 살고 있다. 이런 구조를 방관할 수 없었다.

둘째 우리나라의 신뢰와 국격의 문제다. 비자 발급 업무는 총칼만 들지 않았지 우리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불법 브로커가 낸 위조서류로 이민을 오는 나라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몽골에서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등급의 대통령 훈장인 ‘북극성 훈장’을 받은 것은 이런 성과 때문인지

북극성 훈장은 다양한 분야에서 몽골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수여하는데 임기 중인 외국 외교관이 받은 것은 처음이라 들었다. 울란바타르 시정부가 수여하는 울란바타르 훈장, 몽골 평화우호기구가 수여하는 금성 평화훈장도 받았다. 몽골 영사로 부임해 한국 비자의 클린행정을 실현하고 한국비자에 대한 몽골 사회의 인식을 높여 양국의 신뢰 구축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2년 동안 지낸 몽골을 소개한다면

몽골 사람들은 광활한 초원지대에서 사는 유목민족이어서 성품이 순박하고 정이 많은 민족이다. ‘자신의 게르에 찾아오는 손님은 절대 내치지 않는다’는 초원의 법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와 몽골은 1990년 수교를 맺었으며 인적교류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다. 우리가 체감하는 것 이상으로 몽골에서 우리나라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내 장기체류하는 몽골 국민이 버는 소득은 연간 약 1.5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몽골 예산이 4.5조원 정도 되니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영사 재직 시절 몽골 관료를 만나면 몽골의 아이막(우리나라의 도에 해당하는 몽골의 지자체) 수를 묻곤 했다. 몽골 아이막 수가 21개니 다들 21개라고 답했다. 그러면 “아니다, 22개다. 22번째 아이막이 바로 한국이다”라고 농담처럼 주장했다.

 

몽골과 친하게 지내야 할 이유가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몽골의 자원 매장량은 세계 7위 규모다. 석탄·구리·철광석·금 등의 매장량이 100년 이상 채굴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다. 아직까지 탐사하지 못한 광산도 상당히 많다. 부존자원으로 본다면 몽골은 미래가 정말 밝다. 그래서 한·몽 관계는 우리 후손을 위해 미래를 내다보며 돈독히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평택시에 미래의 주역이 될 청소년 간 교류를 제안하고 싶다. 평택시는 무한한 미래 발전 가능성을 품은 역동적인 도시다. 평택 청소년이 미래를 준비하고 시야를 넓힐 수 있게 몽골과의 교류에 주목할 것을 권하고 싶다.

 

외국인이 늘어나면서 외국인노동자나 난민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감을 종종 보게 된다

이런 반감은 당연하다. 오랜세월 단일민족 국가로 배우고 순혈주의를 강조하며 이를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왔다. 게다가 1988년 국내에 사는 외국인이 5만명이 안 될 정도로 적다 보니 외국인과의 접촉 자체가 드물었다.

난민의 경우 오해가 좀 있다. 난민은 그 나라에서 종교, 정치적 이념 등의 이유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이들이다. 정치·종교적인 이유로 우리나라 국민 누구나 난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범죄를 저지르고 오는 사람 정도로 여기는 시각이 있으니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역지사지로도 볼 필요가 있다. 해외여행에 나서는 국민도 연간 2000만명에 이른다. 외국인에게 혐오 표현을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셈이다. 외국인이 우리 것을 빼앗아간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나라에 기여하는 점이 훨씬 많다.

앞으로 외국인과의 접촉이 늘고 난민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유연해지고 다문화수용성도 강화될 것으로 본다.

 

다문화수용성의 강화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현재 우리나라는 유사 이래 이민자 유입이라는 새롭고 낯선 사회현상과 정책경험을 하고 있다. 다문화 공동체를 한국인으로 품어야 하는 시민적 민족주의(Civic Nationalism)의 양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미래 한국사회는 국제화 경험을 한 10~30대가 주도하게 될 것이고 지금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매끈한 돌이나 거친 돌이나 다 제각기 쓸모가 있는 법이니, 모두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다. 낯선 문화에 대한 즐거움이 바로 창의성의 원천이라 생각한다. 서로 다른 것에 매력을 느끼고, 서로 다른 문화와 생각이 공존할 때 우리사회는 더욱 발전하리라 생각한다.

평택의 미래도 매우 밝다고 본다. 무엇보다 국제화·세계화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낮다. 더 나은 발전을 위한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앞으로 평택이 현재의 토대를 어떻게 관리하고 발전시켜 미래세대에 어떻게 가르치고 전수할지 기대가 크다.

 

몽골 전통악기인 마두금(모링흐르) 연주솜씨가 수준급이라던데

2017년 가을 몽골 국립공연장에서 마두금 앙상블 공연을 관람했는데, 마두금의 선율이 큰 감동을 줬다. 그래서 2년간 열심히 배웠다. 마두금은 2개의 현으로 이뤄졌는데 처음에 연주하기 쉽지 않았고 아직 수준급이라 하기는 부족하다. 경희대 동문의 남편을 선생으로 소개 받았는데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수업을 들었다. 마두금을 연주하며 더 깊이 이해하게 된 몽골의 역사와 사회, 문화예술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려는 취지에서 최근에 연주CD도 제작했다.

개인적으로 케이팝과 마두금을 융합한 음악은 어떨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와 몽골이 수교한 지 30년을 넘었으니 새로운 음악장르가 탄생하길 바라본다.

길강묵 전 영사가 몽골 악기인 마두금을 연주하며 몽골인들과 협연하고 있다. 마두금의 매력에 푹 빠진 길 영사는 연주CD를 낼 정도로 수준급 솜씨를 자랑한다.

공직 생활 20년간 평택에서 서울로 출퇴근했다는 게 사실인가

부모님이 제가 1살 때 평택에 자리를 잡으셨다. 이후 평택고등학교(32회)를 다녔고 50년 이상을 살고 있다. 부모님이 살고 계시고 친구들이 다 있지 않나. 평택을 떠나 다른 곳에 살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 서울로 왔다갔다 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예전에 대학을 가려고 삼수를 할 때 단련된 덕분인 듯 싶다. 그때 이른 새벽 비둘기호라 부르던 완행열차를 타고 노량진에 있는 학원에 가 공부하고 밤늦게 내려오던 생활을 2년 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우리 정부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이민정책을 대체해 왔다. 이민정책은 한 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복지 등 미래를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추진해야 하며 그 중심에 법무부가 있다. 1월 18일부터 화성외국인보호소 소장으로 부임하는데, 이민정책이 차근차근 올바르게 추진돼 우리 사회의 미래를 밝히는 데 온 힘을 다하겠다. 김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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