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이라 불리던 포승 만호리 포구, 평택항 역사(力事)에 묻혀 사라져

원효‧의상 AD 661년 2차 대당 유학길
육로로 직산 거쳐 대진나루 길 선택 
원효 해골물 설화 중심지 ‘홰대기곶’
지금의 포승읍 원정리 ‘괴태길곶(槐台吉串)’

경양포(팽성 노양리)

[평택시민신문] 평택항 일원은 이전에는 대진(大津)이라고 불렸고, 이 한가운데에 영웅바위가 있다. 대진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일고 있지만 충남과 경기도에 걸쳐 있는 아산만 일원을 지칭했던 표현으로 보인다. 영웅바위 역시 충남과 경기도에서 역사와 설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웅바위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역사적 ‧ 문헌학적 고찰이 필요한 상황이다. 최근 평택‧당진항 신생매립지 경계분쟁이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대법원이 영웅바위를 현장 검증할 예정이라고 한다. 평택과 대진, 평택과 영웅바위에 관한 고찰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평택과 당진, 나아가 충남과 경기도가 역사적 경험을 공유했던 대진과 영웅바위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상생의 계기를 만들기를 기대해보며, ‘대진과 영웅암 이야기’라는 글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필자 한도숙씨는 전국농민회총년맹 의장을 역임하고 현재 평택섶길추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주석자 윤한택씨는 고려시대사로 고려대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편집자 주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대진의 흔적들

대진(大津)에 대한 역사기록을 보면 이렇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한강유역을 점령, 개로왕을 죽이고 (AD475년), 이곳을 상홀현(上忽縣) 또는 차홀(車忽-수릿골, 현재 안중읍 용성3리 설창마을)이라 개칭하였으며, 신라 진흥왕은 한성 백제 땅을 빼앗고 신주(新州)를 설치(AD553년), 진천지역의 세력가였던 김무력~김서현~김유신집안이 백제 의자왕 군대를 격파하여 대진에 대당조공로(對唐朝貢路)를 열었다.(AD649년).

대진(大津)은 혜군 가리저(槥郡)1) 可里渚-현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 동쪽에 백제의 수군창이 있었던 것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평정하고(AD660~663년), 신라에서 수관(稤館)2) 을 설치하여 대당 조공로(對唐 朝貢路)로 이용하였다.3)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10년전(AD651년) 육로를 통해 당나라로 가던 계획이 고구려에 막혀 되돌아갔다. 2차 당나라 유학길(AD661년)에 오르는데 이들은 경주를 출발해서 하늘재(계립령)를 거쳐 충북 진천의 도당산성~협탄령(현 엽돈재)~양성~직산~대진나루를 통한 안전행로를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직산은 해석의 여지가 너무나도 많다. 현재 평택항 남쪽 신영리가 직산말이고 오성면 대반3리가 직산말이다. 그리고 현재 직산은 천안시에 있다. 직산현의 월경지가 오성면과 포승면에 나눠져 있던 이유인데 어느 직산을 거쳤는지에 관해서는 알 길이 없다. 현재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경로는 양성과 직산이 순서가 바뀌어 있어서 직산 거쳐 양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양성에서 수원으로 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나 이 또한 현재의 평택항 일원이 양성땅이라서 그리 확정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할 수 있다. 특히 원효대사의 유명한 해골물 설화의 중심지 역시 ‘홰대기곶’으로 지금 ‘괴태길곶(槐台吉串)’이다. 여기는 조선5봉수로가 지나가는 봉화대가 있고(현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봉수대) 서남쪽에 염거(廉居, ?~844) 스님이 창건한 사찰인 수도사 터가 전해진다. 현재의 수도사는 산을 넘은 원정6리에 새로 신축 한 것이다.

수도사 터에서는 최근 해군사령부 공사를 할 때 불상과 주춧돌이 발견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구전으로 전해지는 원효스님의 해골물 설화는 그를 뒷받침 하는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하여튼 원효스님은 대진을 통해 당나라로 가려다 그만 길을 잃고 굴속에 들어가 피곤한 몸을 누였다가 해탈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의상은 대진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갔을 터이다.

1872년 지방지도 수원부에 나오는 대진지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바탕으로 주변 역사 지리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대진(大津) 인근 용성4) 은 신라 경덕왕이 차성(車城)이라 (AD 757년)하고 당은군(唐恩郡-남양)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 광종7년(AD 965년) 무렵에 용성현(龍城縣)으로 고쳤다.

대진(大津)5)은 조선시대 직산현 왜곶이(外也串, 吾也串) 월경지로 서쪽으로 80리에 있으며,

수원도호부 서남쪽으로 1백리에 있고, 넓이가 10여리인데 조세(潮勢)가 사납다. 가운데에 임진왜란 시 왜군을 물리친 영웅암(英雄岩, 또는令翁巖)이 우뚝 서 있는데 높이는 1백 척 가량 된다. 만조(滿潮) 때에 배로 건너면 홍주(洪州-홍성) 면주(沔州-면천)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捷路)이다.”라고 기록 되어 전한다.

또 수원부 조에는 치소(治所)로부터 남쪽 1백리 지점 포내미6) 에 있다고 하였다. 포내미는 포승지역에 있었던 고려시대 지명(포내미 부곡)이다. 통상 대진(大津)이라고 기록되었지만 다른 기록에는 한진, 또는 대포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이곳 대진의 배후지역은 현 안중읍 용성3리 설창(수리골)인 것으로 보인다. 수리골은 머리를 의미하며 지금으로 말하면 수도가 된다. 고구려가 남쪽으로 이곳을 중요 거점으로 삼았다가 신라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용성은 용성현의 이름이 남은 것이며 설창마을은 창고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길성리 산성과 비파산성, 자미산성, 무성산성과 남쪽으로 이어지는 덕목리 산성, 기산리 산성들이 대진과 연관된 산성들로, 대진의 배후 읍치였을 가능성이 짙다.

대진(大津)의 포승읍 만호리는 ‘느지’ 또는 ‘느새’라는 전래 자연지명이 있는 곳으로 늘어졌다는 뜻이다. 산이 길게 바다를 향해 늘어진 곳을 느지라 한다. 따라서 천연적인 항구의 입지조건을 보유한 곳이다. 이 나루 부근은 바닷물의 흐름이 사나웠지만 바다 쪽으로 열려있어서 일제강점기에는 당진이나 서산 사람들이 이곳으로 드나들었다.

대진과 영옹암에 대한 기록이 1614년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7)에도 나온다.

大津在京畿,忠淸之間。水路三十里。 대진은 경기, 충청도의 사이에 있다. 수로는 삼십리며,
中有大石。舟觸則碎。俗號賽神令公。 그 중간에 큰 돌이 있다. 배가 부딪치면 부서진다. 세속에 굿의 신, 새신 영공이라 부르며(중략)
或疑令公。卽靈君云。영공은 의심나고 즉 영군(靈君)이지 않을까

 

사라진 것일 뿐 없어지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대진은 영공암이 있고 그 영공암이 신령스럽게 바다를 지켜주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뱃사공이나 오가는 객이나 영웅바위에 안전을 기원하는 것은 약한 인간의 마음에 믿는 구석이 된다.

영웅바위는 세파에 시달리며 헐벗은 몸을 바다에 기대어 지난 영광을 추억하기라도 하지만 대진은 이름뿐 아니라 포구도 사라졌다. 만호리 포구는 어항의 역할을 하다가 70년경 어업보상을 받고 모두 평택항의 역사(力事)에 묻혀버렸다. 지금도 평택항에서 배를 타면 중국 산동성 위해시에 닿는다. 2000년의 시공이 다시 연결된 것인가... 이제 또 누가 있어 영웅암을 노래할 것인가.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 가는 동아시아 지중해의 파수꾼으로서.

 

글 한도숙/각주 윤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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