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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섶길, ‘진위현길’을 걷다
평택시민신문 | 승인 2020.09.23 11:08

진위역에서 면사무소까지 6km 구간
평택의 뿌리인 옛 진위현 역사 탐방길

조선왕조 진위행궁이 있던 자리엔 
평택 최초 진위공립소학교 열었다는 기록만

[평택시민신문] 지루한 장마로 인해 거의 한 달 만에 속개한 섶길 걷기는 ‘진위현길’. 애당초 ‘뿌리길’로 명명했다가 평택의 뿌리가 어찌 진위뿐이겠냐는 문제 제기를 받아들여 이름을 진위현길로 바꾼 터였다.

출발기점은 진위역 오리(五里) 정자. 그 옛날 걸어 다니던 시절에는 길손들이 쉬어가라는 취지로 5리마다 누정(樓亭)을 마련한 데서 유래했다는 한도숙 씨의 설명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 보호수로 지정된 홰나무 앞에서 역사(驛舍)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육교를 힘차게 건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진위면(振威面) 하북리(下北里). 해박한 해설자의 풀이에 몇 글자를 보태면 먼저 ‘진위’는 원래 ‘나루터[津]의 위’ 땅이란 반 한글 명칭을 일제가 아닌 신라 경덕왕이 당나라식으로 고치는 바람에 그대로 굳어졌고, ‘하북’은 고구려 때 축성한 산성의 북쪽 아래 ‘성뒤말’인 하북1리에다 아랫말인 하북2리를 합쳐 이뤄진 지명이었다. 일각에서는 일제강점기에 개설한 1번 국도와 경부선철도가 놓이면서 진위천[河] 북(北)쪽에 생긴 마을이라는 데서 비롯되어 차츰 한자의 형태가 변한 걸로 추정하기도 한다.

딱딱한 대로변에서 접어든 고샅길. 소문난 할머니 김치찌개 집을 꺾어 들어가자 번듯한 예배당이 나타났다. 단지 일부 교회를 보면 세상의 빛이나 소금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선지 곧바로 마주친 특수학교를 보는 마음도 꽤 불편하다. 이를 놓칠세라 한 분이 중세 예루살렘을 두고 벌어진 십자군 원정의 죄악상을 질타했다. 잘못된 행태를 향해 매섭게 꾸짖는 소리를 귀담아듣고 적어도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전봇대를 팻말 삼아 쓴 붓글씨를 보고 끼어든 숲길. 언뜻 꽃인지 열매인지 식별이 어려운 식물류를 보았다. 다들 약속이나 한 듯 건네는 한마디.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 다시 찾아온다면 알 수 있겠지? 조촐한 분묘 조성지. 탁 트인 시야에 드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그 묏등에서 풀어헤친 장호천 일대에 대한 굵직한 설명. 마르지 않는 냇물을 자양분으로 만석꾼이 나왔다는 얘기부터 반란을 일으킨 아전들의 후일담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 흥미진진한 소재들은 죄다 어디서 발굴한 걸까?

순간 나는 택리지와 동국여지승람 등 고전은 물론 관련 서적들을 읽고 발품을 팔아 터득한 결과라고 대뜸 응수했다. 마치 해설사를 속속들이 알고 지내는 벗인 양. 때로는 날카롭고 난처한 질문도 서슴지 않으니까. 그래서 선뜻 일주일 만에 끝장난 난동의 원인을 캐물으니 알려진 바 없음. 하긴 진위천을 따라 해창이며 공세창까지 가서 군량미를 탈취하고도 생난리 축에도 못 들었다면 역사적 기록물로 남아있을 리 만무한 참이렷다.

그나저나 수풀이 좀 우거졌다 싶더니 오가던 길이 가로막혀 그만 돌아서야 했다. 하릴없이 우회로를 택해 가까스로 비좁은 사잇길로 빠져나왔다. 섶길과는 동떨어진 가로변. 머리가 두 개 달린 커다란 거북이 모형이 주유소 덮개에 엎드려 있었다.

첨단시대에 걸맞지 않은 장삿속을 지나쳐 마주한 진위도서관. 튼실한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가자 각종 운동 시설을 갖춘 ‘견산공원’이 기다렸다. 꿀맛 같은 휴식. 멀리 부락산과 덕암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견산(見山)이란 명칭의 우리말 이름은 벌뫼 또는 벌미. 이 고을에 고구려 때부터 토성을 쌓았고, 견적대(見敵臺)라는 망루를 세워 사방을 조망할 수 있었으리라. 견산2리는 산직(山直), 곧 산지기촌으로도 불렸다는데 산성 병졸들의 숙소로 이뤄진 마을이었기에 더욱 봉우리의 딴 이름이 없다는 게 의아했다.

한승아파트를 거쳐 오르는 고갯길에는 서낭당이 버티고 있었단다. 그 삼남로에 자리잡은 대기업 LG전자를 뒤로하고 발길이 닿은 곳은 가곡리(佳谷里). 양반 고을답게 동네 어귀에 여러 채의 기와집과 함께 수령이 350년이나 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었다. 안동권씨가 모여 살았다는 가실·개실·계실·계시루 등은 모두 같은 말에서 변형된 것으로 7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는데 가야실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분이 나왔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이참저참 나중에 글로 정리하며 발견한 건 인근에 조선왕조 진위행궁이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 그러니 부임한 진위현감마다 이곳을 거쳐 가는 고관대작들을 대접하느라 재정 파탄을 초래할 수밖에. 그 행궁은 왜정 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고, 빈터에 1899년 평택 최초로 진위공립소학교를 열었다는 기록을 확인한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어쩌면 그리 내가 자란 온양행궁과 닮은꼴일까? 앞서 진위산성(일명 봉남리산성)이 있었다는 설명을 들어선지 감히 복원할 맘조차 품지 못할 만큼 뒤틀린 현실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이런 게 거푸 길을 잃고 헤매는 까닭. 다만 마구 뭉개버린 길목에서는 묘소들이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는 말은 귀담아들을 대목이었다. 산소가 있는 한 반드시 길이 있다는 경험칙이랄까. 역설적이로되 도로개설을 위해 땅을 절개하다가 뜻밖에 파묻힌 사료를 건진 경우도 이따금 나온단다.

무봉산자락에 집터를 잡은 아곡(牙谷)마을. 믿거나 말거나 연주혈(連珠穴) 명당자리인지라 명문가마다 후손들이 출세 가도를 달렸다는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값비싼 가옥들이 우후죽순 주택가를 이뤘다. 길가에 지은 누각이 있어 걸터앉은 김에 이회영 일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되새겼다. 덧붙여 평택농악의 근원이 되는 남사당을 일으킨 유세기(1893~1983)의 고향도 바로 여기. 조선 후기 전국 5대 놀이패인 진위패를 길러냈고 시조창에도 조예가 깊은 걸로 알려져 있다. 이윽고 옛 관아 터였던 진위초등학교를 지나 당도한 진위면사무소. 첫눈에 띈 건 이순신의 백의종군길 스탬프였다.

끝으로 오리 정자에서 풀어놓은 사연을 듣자니 외가에 들른 어사 박문수나 묵고 가신 임금님이나 사랑하는 이몽룡과 성춘향이거나 간에 이곳 말고 한양으로 통하던 길이 어디 또 있었으랴. 동서로 낸 짝수 길이건 남북으로 난 홀수 길이건 먹고 살기 바빴던 백성들에게는 끼니를 때우려 피땀을 흘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던 동네 한 바퀴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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