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농업의 희망, 로컬푸드에서 찾다

11월 로컬푸드 재단 출범
앞에 푸드플랜 과제 주어져
평택 나름의 기준을 세워 
생산관리, 유통 준비할 것

[평택시민신문] 김준규(60) 평택시 로컬푸드 초대이사장은 2008년 창립된 평택농업희망포럼의 초대 대표였다. 평택농업희망포럼은 평택에서 지역농업의 희망을 모색하는 공개 토론 모임으로서 2011년 경기도에서 최초로 ‘평택로컬푸드 조례’를 제정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8년이 지나 김 이사장은 평택시 로컬푸드재단의 첫 키를 잡았다. 로컬푸드재단은 11월 출범해 학교급식지원센터 사업, 로컬푸드직매장 운영, 농가 조직화, 농산물 홍보·마케팅 등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김 이사장에게 신선하고 안전한 지역농산물을 공급·소비하는 푸드플랜을 실현해야 할 과제가 주어졌다. 
김 이사장은 과거와 달라진 로컬푸드의 과제를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설명한다. “30년 전 아내가 칼에 살짝 베었을 때 15분 이상 달려가 약국 문을 두드려 약을 사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허리가 아프다고 하니 ‘왜 하필 쉬는 날 아프냐’고 타박하게 됐지요, 이런 변화는 사랑이 식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세월 속에서 익숙해지면서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진 거겠죠. 로컬푸드 운동도 예전만큼 열정적으로 하긴 어렵겠죠. 다만 세월이 흘러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 바로 필요한 일을 하겠습니다.”

평택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78학번으로 숭실대 컴퓨터공학과를 다녔다. 당시는 대학생 중 운동권이 아닌 이를 찾기 어려웠던 시기라 생각한다. 학생운동을 하던 1980년대에 전국 단위의 농활을 세 차례 진행하면서 농민운동에 관심을 두게 됐다. 
이후 우연한 기회에 미군기지 문제로 상담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 평택을 귀농할 곳으로 결정했다. 미군기지 확장 이전이 예정돼 있는 지역이어서 여러 문제가 발생할 것이 뻔히 보였고, 화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평택사람으로 살다 보면 제가 해야할 몫이 있을 거라고 보고 1990년 현덕면 도대리로 귀농해 농부로 살게 됐다. 

농민운동을 하고 농업희망포럼을 창립하는 등 여러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농촌선교에 뜻을 둬 농사를 지었고, 농민운동을 했으며 로컬푸드운동을 시작했다. 농사도 농민운동도 로컬푸드운동도 내겐 신앙이다. 
농사가 신앙이기에 벼를 키우는 데 저만큼 전문가가 없다고 자부한다. 1990년대에는 농민운동이 신앙이었다. 당시 농민 생존권을 무시하고 식량을 수입하려는 정부에 맞서 농민운동이 필요했다. 이후 평택농업희망포럼을 주변 농민들과 함께 창립해 로컬푸드 등 지역농업의 희망을 찾기 시작했다. 

건강한 음식을 먹으려는 개인적인 실천에 머무르던 로컬푸드가 행정이 본격 추진한 것은 언제부터라 볼 수 있나
지방자치를 시작하면서부터라 볼 수 있다. 1991년 지방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되면서 지방자치의 시대가 열렸다. 지자체는 지역주민의 삶을 고민하면서 자연스럽게 로컬화됐다. 그렇다면 제도만으로 주민 삶의 질이 높아질까.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데 당연히 의식주가 중요해졌다. 
무상급식 역시 로컬푸드에서 출발한다. 정부가 학생들에게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차별없이 무상으로 제공하자는 것이 취지였다. 

평택농업희망포럼 대표로 활발히 활동하다 8년가량 활동에 공백이 있었다
평택농업희망포럼의 대표였을 때 40대였는데 어느새 20년이 지났다. 그때 목표는 오로지 평택시로컬푸드 조례의 제정이었고, ‘평택시민의 안전한 먹거리는 평택시가 책임져야 한다’ 이 한 줄을 넣는 게 목표였다. 이를 위해 8년을 바쳤다. 
조례 제정 이후 1차 귀농을 일단락 짓고 좀 더 알기 위한 2차 귀농을 했다. 포천에 있는 100년 넘긴 농촌교회의 담임목사를 맡아 6년을 보냈다. 안식년을 맞아 평택에 다시 오면서 평택으로 3차 귀농을 하게 됐다. 

로컬푸드재단 창립 소식을 듣고 이사장을 응모할 생각이었는지 궁금하다
평택에 오면서 로컬푸드재단 소식을 들었다. 이사장이 비상임이고 임기가 2년인데 공모로 뽑는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생각이 없었다. 평생 여러 단체에서 일해왔지만 공모에 응모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무엇보다 공모에서 떨어지면 왠지 상처 받을 거 같았다. 
그런데 지인이 “목사님이 처음을 맡아서 틀을 만들어줬으면 한다”고 권유해 결심하게 됐다. 
무엇보다 평택농업희망포럼을 함께했던 이들이 우리가 원할 때 함께 없었다며 권하더라. 회장을 마치고 다음 회장에 넘겨준다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각자 해야할 몫이 있는데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 

이사장의 역할은 무엇이라 보는지
이사장은 재단 직원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된다. 
평택에는 전국에서 로컬푸드를 하는 사람들의 꿈인 로컬푸드재단 전담부서인 ‘유통과’가 있다. 전담부서가 열심히 하는데 이사장이 참견할 게 없다. 이사장은 쓸데없이 참견하거나 트집 잡는 사람들을 쳐내는 역할을 하고, 직원들은 마음껏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중요한 건 직원과 관계자 간에 로컬푸드가 무엇인지에 관한 합의가 있어야 하고 왜 로컬푸드를 하는지 알아야 하며 자부심을 갖고 일하도록 하는 거다. 처음이라 실수도 있겠지만 맘대로 하라고 했다. 중요한 건 될 일이 뭐고 안 될 일이 뭔지 스스로 깨달으면 된다. 
개인적 바람이 있다면 로컬푸드를 담당하는 직원들은 로컬푸드 한 길만 걸어도 승진하고 퇴직할 수 있게 평택시가 지원해줬으면 하는 거다. 

평택로컬푸드매장을 어떻게 운영할지 구상하는 바가 있다면
로컬푸드 매장은 한두 개의 농산물만 다뤄야 한다. 소량 다품종 판매로 가면 농협 하나로마트, 대형마트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또 농민들만 고달프게 한다. 상추 10개, 고추 20개 이런 식으로 재배해봐야 품만 들고 생산비도 안 나온다. 
평택로컬푸드 매장은 평택을 대표하는 쌀과 배를 다루고, 소량 다품종 농산물은 정기적인 로컬푸드마켓을 열어 판매하면 된다. 

쌀과 배로만 식탁을 채우기 어렵지 않나
로컬푸드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로컬푸드를 평택 한 지역으로 국한해 보지 말고 주변지역으로 시야를 넓혀 보자. 
현실적으로 평택에서 모든 농산물을 다 생산할 수 있나? 평택 농민이 4만명이고 전업농이라고 해도 40%를 못 미친다. 평균 연령 66세인 이들이 평택시민이 먹을 먹거리를 다 생산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평택에서 생산한다고 맛없는 걸 먹어야 하나. 평택에서 상추가 많이 나면 안성으로 보내고, 안성에서 많이 나는 깻잎을 평택으로 가져오면 된다. 
개인적으로 평택 쌀은 같은 경기미인 여주·이천 쌀보다 맛은 좋고 가격이 싸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최근 농산물 소비가 비대면 방식으로 바뀌는 추세인데 
코로나19로 배달 등 비대면 방식이 늘어났다 해서 이런 흐름이 계속 갈 것이라 보지 않는다. 바쁘고 여건이 안되면 배달로 먹거리를 해결하지만 어린시절 먹었던 짜장면, 갓 따낸 신선한 과일을 먹으려면 그곳으로 가야 한다. 
인간은 편리함과 맛 두 가지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먹거리를 소비해왔다. 미래는 건강한 먹거리를 위해 모든 수단이 다 동원되는 사회이지 편리한 먹거리만을 추구하지는 않을 거다. 

평택로컬푸드의 목표를 제시한다면
평택에는 미군기지, 삼성전자, 평택항이 있다. 평택에 주둔하는 미군이 평택에서 생산하는 안전한 먹거리를 먹을 수 있다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평택의 신선한 먹거리를 선택한다면, 평택항을 통해 북한과 중국 등으로 평택 농산물을 수출한다면….
미군이든 이재용 회장인든 북한 동포든 식량의 안전도는 접근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써서 이뤄야 한다. 이를 위해 평택로컬푸드재단이 평택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생산을 관리하고 유통을 준비할 것이다. 
평택은 대단한 곳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격렬하게 미군기지 이전반대운동을 했음에도 인사사고를 당하거나 감옥에 가거나 보상을 받지 못한 사례가 없다. 
이런 저력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안목에서 차근차근 준비하고 기반을 닦겠다. 농업 종자개량에 7년이 걸린다. 하물며 입맛이 변하고 식생활이 변하는 것인데 그보다 더 오래 인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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