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배 의존 열강 붕괴할 것…조선 독립 해방은 역사적 필연”

광복 제75주년 기념 안재홍의 활동 재조명
대외인식, 근대 정체성, 건국 구도 등 다뤄

[평택시민신문] 광복 제75주년을 맞아 제14회 민세학술대회가 14일 평택 동네바보 라운지에서 열렸다.

평택시 주최, 민세안재홍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 이날 학술대회는 ‘안재홍의 민족운동 재조명’을 주제로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기에 이르기까지 안재홍의 지적‧실천적 투쟁과 그 의미를 탐색했다.

학술대회 1부는 이진한 고려대학교 교수의 사회로 김명구 고려대학교 강사, 윤대식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이지원 대림대학교 교수, 김인식 중앙대학교 교수의 주제발표가 이뤄졌다. 이어 2부는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의 사회로 조형렬 동아대학교 교수, 홍원표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채관식 국가편찬위원회 연구사, 오영섭 연세대학교 교수가 참여하는 약정토론이 진행됐다.

강지원 민세기념사업회장은 “민세안재홍기념사업회는 안재홍 선생과 함께 활동했던 민족지도자의 삶을 꾸준히 조명해왔다”며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민세 선생님의 통일을 위한 염원과 노력이 알려지기를 바란다“며 ”학술대회를 통해 민세 안재홍 선생님의 뜻을 받들고자 하는 힘이 한 곳으로 모아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평택시민신문>은 당대 정치지성이자 평택의 대표 인물인 민세 안재홍 선생의 활동이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이날 학술대회 발표 내용을 요약해 싣는다.

 

■ 1주제 안재홍의 구미정세 인식

안재홍이 파악한 국제정세 기본구조는
제국주의 열강, 소련, 약소국 세 조류

김명구 고려대학교 강사

안재홍은 1920년대 국제정세가 ▲제국주의 열강의 기득권 수호 정책 ▲소련의 세계혁명운동 ▲약소국의 민족해방운동 등 세 가지 조류로 움직인다고 봤다.

안재홍은 1924년부터 본격적으로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을 발표했다. 이 시기는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래 갈등이 심화되던 구미 열강이 안보협조체계 형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시기였다. 안재홍은 동방에 대한 제국주의적 기득권 유지와 소련에 대한 공동대응의 필요성에 따라 구미열강이 타협해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했다고 봤다.

제국주의 열강은 전쟁을 피하고자 안보협조를 모색하고 소련 및 동방 민족에 대해 공동대응을 하지만 내부에는 헤게모니를 둘러싼 길항(拮抗) 관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봤다.

러시아는 국제정세의 3대 세력 중 하나로 주목했다. 1927년의 시점에서 강고해진 자본주의 국가와 강고해진 무산계급의 대립이 첨예화하는 것이 당시 국제정세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사회주의 이념과 민족주의적 팽창욕구가 복합돼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약소국의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에 대한 식민지 인민들의 확고한 반항이라고 봤다. 이러한 식민지 약소민족의 도전에 대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계급은 이를 억누르고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봤다. 또 식민지 지배에 의존하는 열강국은 이르거나 늦을 수 있지만 붕괴할 것으로 봤다.

 

■ 2주제 중국혁명을 바라보는 안재홍의 시각과 태도

사회과학적 기법으로 국제정세 분석해
우리가 무엇할지 내부적 해결책 모색

윤대식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안재홍이 국제정세를 분석한 것은 단순히 대중을 계몽시키거나 외부 소식을 알려주려고 한 것이 아니다. 보편적 세계사와 엮어져 있는 상황을 명확히 밝히면서 조선의 독립과 해방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설명했다.

1924년 안재홍은 본인의 입장과 함께 국제동향에 대한 글을 연이어 쓴다. 이 같은 국제인식을 국외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측면관’이라 한다. 이후 인식은 국제문제를 국가 간의 영향을 살피는 ‘종횡관’으로 변한다. 이 시기 안재홍은 제정 러시아의 대외정책을 계승한 소련의 동방정책이 지닌 의미를 분석하는 데 초점을 둔다. 이로 인해 안재홍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더해 소련의 동방정책이 가세하면 우리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고민하게 된다. 보편사로서 세계사, 지역사, 인류사가 맞물리는 역사적 흐름의 격변 현상으로 본 것이다. 이로써 종횡관은 국제정세의 현재(今)오 과거(昔)를 조망하는 금석관(今昔觀)으로 전환된다. 이를 통해 마지막으로 1925년 손문 사후 중국 내부의 권력투쟁 과정을 분석하는 면면관(面面觀)으로 바뀐다.

안재홍이 정통 사회과학자는 아니지만 사회과학적 기법을 사용했다.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을 측면관·종횡관·금석관·면면관으로 이야기하며 세계사·지역사·인류사의 흐름을 볼 때 조선의 독립과 해방이 필연적이며 이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지 ‘대외문제’를 담론‘의 형태로 제기하며 내부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 3주제 1930년대 안재홍의 조선학 연구에서 근대정체성 서사

전통은 근대의 필요에 의해 호명·기억
근대 정체성 수립 서사로 정약용 재현

이지원 대림대학교 교수

안재홍은 1934년부터 조선학운동을 제창하고 <여유당전서> 간행에 참여하면서 정약용을 재현하는 데 주력했다. 안재홍에게 조선학은 근대적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서사를 갖는 근대 계몽의 담론이었다, 전통은 민족 정체성의 역사적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때 전통은 정체성을 수립하려는 민족주의·민족사의 욕망과 기획에 따라 재현된다.

안재홍은 한국형 근대국가가 지향할 사상적 기반을 실학에서 찾았다. 실학은 국가라는 실체를 전제로 군민일체론의 입장에서 국가 단위의 개혁을 추구하는 사상체계다. 그리고 조선학연구에서 정약용을 중심으로 근대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안재홍은 농민 중심의 토지개혁, 사회개혁론을 집대성한 인물로서 정약용을 국가적 사회민주주의자로 명명하고 자신이 지향한 근대국민국가의 정체성을 역사적으로 연계했다. 이를 통해 자생적·자주적으로 정체성을 갖고 근대를 꾸려나갈 수 있는 주체를 복원하고자 한 것이다.

전통은 근대의 필요에 의해 호출된다. 대외적으로 근대 국민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보이고 대내적으로 국민을 결집·동원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는 점에서 전통은 유용하다. 어떤 전통을 만들고자 하는가에 따라 전통은 다르게 불리고 기억된다. 한국 근대사 속 전통은 그러한 구도 속에서 선택, 정형화돼 전승됐다. 안재홍은 독자적인 근대국가의 지향·저항성·정체성의 서사를 계몽하고 웅변하는 데 유의미한 전통으로 정약용을 재현했다.

 

■ 4주제 1945년 8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건국 구도

여운형‧안재홍의 일치점에서 건준 출발
해방 후 역사적 단계를 건국기로 인식

김인식 중앙대학교 교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과 안재홍이 각각 주도한 조선건국동맹과 민족대회소집 운동이 합류한 조직이다. 여운형과 안재홍의 일치점이 건준의 출발 동인이며 차이점이 해체의 주원인이다.

해방을 맞아 여운형·안재홍은 한국의 역사적 단계를 건국기 또는 건국의 단계로 인식·규정했다. 이 시각은 해방정국에서 중간 우파와 중간 좌파 모두 일치했다. 건국의 목표는 자주독립의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건준은 일본제국주의가 강점했던 행정기관 등을 접수해 행정권 등을 인수하고 정치범 석방, 식량확보, 치안유지, 건설사업 등을 추진하려 했다. 하지만 여운형과 안재홍은 건준의 주력과 추진 방식에서 시각차를 드러냈다.

여운형은 현 단계를 식민지 정권과 한국인의 새 정권이 교체되는 과도기로 인식하고 혼란기 대중을 지도해 그들의 역량을 육성하는 데 건준의 사명이 있다고 봤다. 그는 건국의 추진력을 청년·학생을 운동의 주력부대로 삼고 노동자를 보조세력으로 한 협동에서 찾았다.

안재홍은 해방기를 낡은 정치와 새로운 정치가 교체하는 시기이자 민족의 성패가 걸린 비상 시기로 표현하고 치안 유지를 일순위의 문제로 봤다. 그는 대중의 감정적 판단과 행동으로 혼란이 오는 사태를 방지할 것을 당면한 긴급 문제로 제시했다. 특히 한일 두 민족 사이의 유혈방지를 제시했는데, 이는 유혈사태가 한반도에 남아 있던 일제 군경을 자극해 대량 학살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경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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