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평택문인협회 부지부장 이 혜 복 씨

삶의 아픔을 탓하지 않으며 인생의 좌절을 '노력'으로 극복해낸 한 사람이 있어 그녀를 만나봤다.

평택문인협회 부지부장이면서 동시 작가로, 학원원장으로,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두 자녀를 둔 어머니로 살아가면서 틈틈이 자신의 시간을 쪼개 운동에서 음악까지 폭넓은 분야에 걸쳐 자신의 삶을 다듬고 그 바탕 위에 '봉사'라는 단어를 살짝 올려놓고 사는 이해복(58년생, 세교동 거주)씨.

이해복씨는 인천에서 태어나 지역의 명문고인 인천여고에 진학해 오랜 꿈이었던 교사의 길을 걷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미 그녀를 가로막고 있는 현실들은 이씨를 가만히 나두지 않았다. 중1때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지고 있던 넓은 전답은 다른 누군가들에 의해 공중분해 되었고 살림밖에 모르시던 어머니는 다른 일을 찾지 못하셨고 오라버니는 그저 집밖만을 서성일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을 찾아야 했고 가정교사를 해야 했으며 그나마 타고난 운동신경 덕으로 핸드볼과 육상, 태권도에서 입상하여 등록금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전 제가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시대에는 다른 많은 분들도 모두 똑같이 힘들었지요. 다같이 보릿고개를 넘고 있었으니까요'라고 말하며 이해복씨는 '힘들다고 어렵다고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또 닥쳐온 슬픔을 극복하지 않으면 그냥 쓰러질 수밖에 없거든요.'라고 한다.

이해복씨의 이런 사고방식은 오늘날의 그녀를 있게 해 줬다.
82년 현재 1남1녀를 두게 된 남편과 함께 평택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이미 청소년기에 여러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터득한 노하우와 다방면에 걸친 지식, 78년 방통대를 가정관리학과를 다니면서 따 논 자격증들과 교사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오성학원). 그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는 교사의 소명의식이 언제부턴가 몸에 베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돈의 상관없이 아이들 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다른 선생님들을 더 고용했고 자질이 부족한 선생들을 위해 본인이 밤새 피아노를 배워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몸에 적신호가 켜졌다.

'92년에 다시 방통대 국문과에 입학했어요. 이 때 문협일을 같이하게 돼 무척 바쁘게 지냈지요. 그러다 어느 날 위의 구멍이 났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어쩌면 여기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현재 이해복씨는 동시문학 작가로서 '장갑 한짝'을 펴냈고 써 놓은 작품 수만 해도 500여편이 넘는다. 조금 과장될지 모르나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된 순간 나보다는 그 동안 가르쳐 온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게 된 이씨는 자신이 늘 부족하다며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루 일과를 가사에서 시작해 시민아카데미 한글교육 교사, 오성학원 학원장겸 교사, 저녁가사, 배드민턴 동호회, 자녀들과의 시간 이후 글을 쓰고 있는 이씨는 하루 평균 4∼5시간 이상을 자 본 일이 없다고 한다.

'구르는 돌에 이끼가 끼지 않듯이 나태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끝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묻자, '요즘 우리 여성들이 가끔은 지금의 상황에 안주하여 살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생각을 해요. 시간과 금전의 문제가 해결됨에 따라 너무 안이하게 살고 있어요. 허나, 우리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가르쳐주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일임을 알았으면 해요.'라고 했다.

오랜 시간 이해복씨와 마주 앉아 있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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