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은 지행합일의 큰 선비이자 민족지성

 

민세의 고향인 평택은 그 정신 계승해야 할 정체성 있어
경제·교육 민주주의 성취는 민세 정신 계승·실천의 핵심
교육·사회복지 함께 추진해 민세주의 실현된 평택 기대

[평택시민신문] 평택을 대표하는 인물인 민세 안재홍 선생은 김규식, 여운형 등과의 좌우합작활동을 이유로 군부독재 시기까지 크게 알려지지 못했다. 안재홍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안재홍 연구자들과 민세안재홍기념사업회의 노력의 결과다. 연구자 중 김인식 중앙대학교 교수는 1997년 민세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역사학계 1호 박사다. 김 교수는 안재홍의 전기를 비롯해 항일운동 역정, 신간회, 조선학운동, 해방 후 신국가건설운동 등에 대해 수십 편의 논문을 썼으며 현재까지 안재홍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의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평택시민신문>은 광복 제75주년을 맞아 안재홍 연구자 김인식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근대사와 안재홍을 연구한 계기는

분단 극복을 위한 역사학의 일환으로 민족통합 항일운동단체인 신간회에 관심에 갖기 시작했다. 석사과정에서 신간회 관련 논문을 쓰다 보니 신간회의 중심에 안재홍 선생이 있음을 알게 됐다. 박사 과정에 들어와 안재홍을 주제로 공부한 끝에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사상과 운동>이라는 학위 논문을 제출했고 지금까지 안재홍을 연구하고 있다.

연구자로서 안재홍을 어떻게 보는지

“안재홍 선생은 민족 운동가로서,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해방후로는 정치인으로서, 그 분야에서마다 굵직한 자리를 차지하는 고절(高節)의 국사(國士)”라고 안재홍 연구의 물꼬를 튼 천관우 선생은 <안재홍 연보>(1978)에서 표현했다. 총 9차례 7년 3개월의 옥고를 견뎌내면서 신민족주의 사상을 창안해 민족의 진로를 제시했으므로 ‘고절의 국사’라는 표현은 결코 찬사에 치우친 표현이 아니다. ‘국사’를 다른 말로 바꾸면 ‘민족지성(民族知性)’이라 할 수 있다. 안재홍 선생은 해방정국에서 한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민족지성이자 사상가였다. 안재홍 선생은 앎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화를 하나 들면, 미군정기에 민정장관으로 재임하던 때 자제 분이 혼인을 하셨는데 지인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혼사를 치렀다. 축의를 빙자한 뇌물을 일체 거부한 것이다. 어느 세상에나 지식이 많은 사람은 많지만 ‘지행합일’의 지식인은 많지 않다. 이 점에서 안재홍 선생은 이 나라의 진정한 ‘큰 선비’요 ‘민족지성’이다.

그동안 안재홍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1980년대까지도 한국사회는 냉전 이데올로기와 반공주의가 지배이념이었다. 이러한 극우 이념은 해방정국의 ‘중간(중도)파’ 인사들도 ‘빨갱이’로 매도했다. 그 시절 중간좌파의 대표인 여운형과 중간우파의 대표 격인 안재홍을 해방정국의 중심인물로 부각시키기는 어려웠다. 여운형과 안재홍 선생은 각론에서 차이가 있지만 새로운 국가의 정부는 좌우연합(연립)정부가 불가피하다는 공통된 인식이 있었다. 이것이 1946년 5월부터 시작하여 1947년까지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였던 이유였다. 또 주류 정치세력이 좌우합작운동과 거리가 있었던 단독정부 추진 세력이었다는 점도 안재홍 선생이 1980년대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한 이유였다. 그러나 천관우·정윤재 선생 등 안재홍 연구자들의 ‘용기’가 안재홍 선생을 새롭게 조명하는 동력이 됐고, 2000년 10월 ‘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가 발족하면서 안재홍 선생이 ‘민족지도자’로 본격 선양되기 시작했다.

안재홍은 자신의 노선을 ‘순정우파’라고 이야기했는데 순정우파란?

당시 용어로는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진정한 우익’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우파·좌파는 제3자의 시각에서 정치세력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용어다. 자신의 정치 성향을 스스로 지칭할 때에는 우익·좌익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순정(純正)우익’이란 용어는 안재홍 선생이 1947년 10월경에 자신과 동질·동류의 정치세력을 결집하려고 사용한 말이다. 해방정국에서 좌우대립이 극심해 적대관계로 치닫는 1947년 10월경 당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세력 등 극우보수세력과 자신을 분리시키며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던 우익 세력을 결집할 목적에서 사용한 용어다. 해방 후 안재홍 선생은 ‘중간파’라는 말이 기회주의와 동일시되기 때문에 매우 싫어했다.

최근 한국사회가 편 가르기식 흑백논리로 갈등하고 있는데

갈등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항상 존재한다. 갈등 자체를 부정 일변도로만 보지 말고 사회가 한 단계 발전하는 동력으로 보는 시각도 필요하다. 안재홍 선생은 대립·갈등이 적대관계가 아니라 상생·공생하는 관계로 통합되기를 지향했다. 다음 인용하는 어느 학자의 말은 안재홍의 통합 정신을 이 시대의 말로 번안한 듯하므로 소개한다. “사회는 항상 분열되어 있고 갈등은 상존한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사회화·제도화하는 과정이다. 민주주의는 전문가들이 알아서 갈등을 해결해 주는 정치체제가 아니다. 시민들 스스로 갈등 해결의 주체가 되어 이익 결사체를 만들고 서로 갈등하면서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 본연의 모습이다. 그래서 갈등은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엔진인 것이다.”

안재홍 후대로서 우리가 견지할 자세는

안재홍 선생은 “균등사회의 경제적 토대 위에 대중적 정치평등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신민주주의”라고 했다. 또 공화(共和)주의는 공생(共生)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신념으로 ‘다사리주의’를 주장했다. ‘다 말하게 한다’는 정치평등의 공화주의와 ‘다 살리게 한다’는 경제균등의 공생 이념 두 가지를 담고 있다.

안재홍은 한 사회의 부가 특정 계급에게 독점되는 현상을 막고 부의 균등분배를 실현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 이를 위해 ‘근로대중’이라 불렸던 기층민중을 국가사회가 배려하는 입법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교육의 민주주의를 달성함으로써 진정한 민주주의, 즉 신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강조했다. 한국사회가 정치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경제민주주의와 교육(문화)민주주의를 성취하는 일이야말로 ‘민세 정신’을 계승·실천하는 핵심이다.

평택시민과 독자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안재홍 선생은 1891년 고덕면 두릉리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 어느 지역 사회보다도 평택이 민세 정신을 계승하는 데 앞장서야 할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평택이 21세기의 국제화 중심도시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안재홍의 고향에 그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 같아 뿌듯함을 느낀다. 평택이 국제도시로 발돋움하면서 세시풍속을 비롯한 전통문화를 보존하는 문화 정체성도 유지한다면 민족과 세계가 공존하는 ‘민세주의’의 표본이 되지 않을까.

평택이란 지명이 평야와 연못이 많은 데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를 안재홍 선생의 ‘다사리’ 이념에 맞추어 재해석하고 싶다. 넓은 평야 지대인 이 지역의 구성원이 모두 고르게(平) 윤택한 삶을 누린다면 농본주의 사회의 평택이 산업사회의 평택으로 재탄생하리라 믿는다. 개발의 이름 뒤에 가리어진 그늘이 없도록 교육복지와 사회복지를 함께 추진하여 안재홍 선생이 꿈꾸었던 계층(계급) 통합을 이루고 민세주의가 실현되는 새로운 평택을 기대한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