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이래 당항성 입출항인 몽포, 무성산성, 신포에 이르는 길

삼국시대 이래 당항성 입출항인 
몽포, 무성산성, 신포에 이르는 길

일제 강점기에는 남양만 옹포 일대 
소금 실어나르던 물길
남양만 방조제 생긴 뒤 뱃길 끊겨

[평택시민신문] 원효 스님의 체취가 스며있다는 수도사 돌기로 시작한 섶길 걷기는 나를 이내 대숲으로 이끌었다. 유독 대나무를 좋아하는 까닭이 뭐냐는 질문에는 늘 자신을 비운 채 하늘로 곧게 뻗어 올라간 자태를 빼닮고 싶어서라고 답하곤 한다.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니 피어난 꽃들도 예쁘고 알알이 맺힌 열매도 실하지만 울창한 대나무 숲속이 가장 좋았다.

절밥으로 이름난 사찰에서 출발한 소금뱃길은 삼국시대 이래 당항성의 입출항인 몽포, 무성산성, 신포에 이르는 길로써 일제 치하에서 남양만 옹포 일대의 소금을 실어나르던 물길이었다. 원정리 주택가에 자리한 절터를 벗어나니 곧바로 군사시설처럼 뵈는 담장이 나타났다. 철조망이 예사롭잖기에 물은즉 뜻밖에 한국석유공사에서 관리하는 1급지. 지하에 비밀이 많아 절대 침입하지 말라는 경고문까지 붙여놨다. 듣자니 그리 넓지 않은 터에 뭘 숨겼는지 견학의 대열에 합류해보리라 맘먹을 만큼 나의 호기심을 잔뜩 자극했다. 아닌 게 아니라 곳곳에 박힌 고압가스관 주의보 팻말. 아마도 이 일대는 기간산업에 긴요한 대동맥이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나 보다.

남양호 철새도래지에서 신포에 이르는 뱃길은
일제 강점기 가렴주구의 통사 맺힌 곳

남양호 철새도래지에서 신포에 이르는 뱃길은 일제강점기 가렴주구(苛斂誅求)의 통사(痛史)가 맺힌 데였다. 남양만 방조제를 저만치 두고 강줄기 같은 담수호를 껴안고 나란히 걸어가는 길. 유공에서 농로를 말끔히 닦아줘 걷기에 편했다. 게다가 오가는 차량도 거의 없는 편. 초장에 월척을 낚은 강태공이 일행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득의양양한 표정 뒤에 감춘 낚시 금지의 위법행위는 본인의 몫이로되, 문제는 늘 쓰레기로 뒤덮이는 강변이다. 표심을 의식한 느슨한 법 집행으로 인해 벌어지는 무법천지를 마냥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데 이의가 있을까?

섶길 리본을 매단 솟대를 뒤로하고 필자의 눈에 띈 물체는 호수 위를 수놓은 점점이들. 선뜻 물오리처럼 보였으나 정치망 그물을 표시한 부표였다. 이처럼 양식업을 허가했으니 낚시는 불허한 건데 아예 차를 대놓고 망중한을 즐기는 족속들이 즐비한 게 우리네 현주소렷다.

저쪽 건너편은 고잔리. 뜻을 풀자면 곶의 안쪽이란 연음이다. 재밌는 건 남양만과 아산만 바닷물을 아울러 볼 수 있어 광판대기라고 부르는 것. 그나저나 물속을 비집고 애처롭게 자라난 물풀은 갈대일까, 억새일까? 강선생 말마따나 민물과 짠물이 뒤섞였다면 갈대일 텐데, 왠지 내 눈엔 갈대를 닮은 억새쯤으로 보여 연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래전 돛단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는 말에는 이루 형용하기 어려운 수탈의 아픔이 앙금처럼 가라앉아있다.

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덩그러니 서 있는 정자. 그 계단 밑, ‘둘레길 평택섶길 소금뱃길’이라 새긴 뭉툭바위는 우릴 보고 도곡교로 가라고 눈짓한다. 그쪽을 향하자 멀리 첨탑 세 개가 시야에 들어왔다. 진리의기둥교회라는 귀띔에 흠칫 놀라며 그 이상은 실례가 될까 봐 더는 캐묻지 않았으나 뾰족한 탑을 세 개씩이나 세우느라 쏟았을 안간힘을 떠올리니 갑자기 맘이 불편해졌다. 기실 이면사를 아는 자는 그 너머를 보고 있기에 조심스레 덧붙이는 말이다.

“오래전 돛단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는 말에는 
이루 형용하기 어려운 수탈의 아픔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다”

남양호 담수호를 껴안고 물풀과 물닭,
백로 감상하며 시멘트 포장 논둑길 걸다
무논 냄새 맡으며 동심에 젖어

이제부터는 논둑길. 하지만 어릴 적 아슬아슬한 논두렁을 상기하면 아련한 동심의 세계다. 시멘트 포장길에서 무논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오전 나절, 오늘 걷기 일정의 일등공신은 구름 기둥이다. 하늘 만한 양산이 양팔을 벌려 한여름 땡볕을 따라붙으며 온몸을 감싸주는 모양새. 섭씨 30도를 웃돈다는 일기예보에 어렵사리 발걸음을 떼기는 했어도 내심 큰 걱정을 했노라고 밝은 표정들을 지었다. 어찌 걷기뿐이랴.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에게나 고기를 잡는 어부에게도 이런 날씨는 축복인 것을! 그때였다. 강폭이 좁아진 물길에서 쥐오리 한 마리가 외로이 헤엄을 쳤다. 한쪽에서는 그걸 물닭과는 다른 물병아리라길래 궁금증을 풀 겸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의아한 명명의 흔적이 뚜렷한 말. 둘 다 오릿과에 속하는 건 맞지만 ‘물오리’는 들에 사는 모든 오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쥐오리는 오리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몸이 더 작고 날개와 꽁지가 짧은 새를 가리켰다. 몸빛은 등 쪽이 검은 갈색, 배 쪽은 잿빛을 띤 백색으로 머리에는 긴 털이 있다는 상세 설명과 함께. 그러니 물닭(일명 흰배뜸부기)은 뜸부깃과에 속하는 물새일 뿐 물병아리는 원래 없거나 필자의 추정치대로 물닭 새끼라야 딱 들어맞는 언어조합인 셈이다. 눈을 드니 백로 한 쌍이 훨훨 먹이를 찾아 날아가고 있었다.

반가이 맞아주는 야산자락. 그런데 그곳은 갈등(葛藤)의 현장이었다. 거목에 치여 가까스로 으름이 꽃을 피웠는데 안쓰럽게도 칡넝쿨이 온산을 어지럽히는 바람에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설령 얽히고설키는 등나무는 없더라도 생태계를 교란한다면 밑동을 가차 없이 잘라주는 일도 올바른 처방이리라. 거기서 자연스레 화제가 정치로 옮아갔다.

개개인의 실명도 오르내렸지만 굳이 거명하지는 않으련다. 다만 아무리 정치인 중에 맘에 드는 자가 없고 현실 정치에 신물이 나도 무관심한 냉소주의는 정치 혐오증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 지나간 오욕의 장면을 생생히 기억은 하되 용서할 줄도 아는 아량을 베푼다면 삶을 규정하고 재단하는 법치주의의 기틀을 깨인 유권자들이 바로잡는다는 희망조차 버려선 안 된다는 걸로 뜻이 모아졌다. 빙그레 미소를 짓게 하는 토론의 장. 고백건대 이것이 필자를 섶길로 이끌고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다. 매사 옳은 방향설정이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확신하므로.

‘햇살들농장’에서 맛깔스런 점심하고
질퍽한 홍원교, 옛 지명이 옹포인
삼계리 지나니 종점인 청북읍사무소

그늘막이 한 뼘 모자란 휴게소에서 잠시 가진 휴식시간. 뱃속에서 출출하단 신호음이 속속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이미 정오를 넘긴 시각. 짤막한 다리를 건너 발걸음을 재촉했다. 걱정이 되었는지 점심 대접을 약속한 주인장이 마중을 나왔다. 서둘러 당도한 곳은 ‘햇살들농장’, 한눈에 기업형 농원의 면모가 확연했다. 정겨운 흙길을 지나 연잎이 가득한 늪지에 그만 한눈을 팔다가 널따란 잔디구장을 만나 가만히 살펴보니 뗏목 타기부터 고구마 캐기까지 농촌체험 프로그램이 한창일 때로 되돌아간 느낌. 그도 그럴 것이 천연잔디의 질감이 한바탕 뛰어놀고픈 충동을 일으킬 만치 되게 푹신했다. 하지만 당장 내게 급한 건 아우성치는 위장 달래기. 밥은 아주 조금 푸고 기름기 없는 수육을 나우 담아 버섯요리와 가지가지의 음식들을 된장국에 곁들여 맛나게 들었다. 솔직히 김치는 마누라 솜씨가 더 나았지만 감히 범접지 못할 맛깔스러움의 향연은 그야말로 일행을 행복과 축복의 도가니에 빠뜨리고도 남았다. 오죽하면 상추쌈에 낀 벌레알집마저 유기농을 증명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으랴. 살살 녹는 애호박찜이 혀끝에 감도는 사이 감식초로 입맛을 추슬러도 귀한 밥상은 눈앞에 내내 아른거렸다.

남은 건 무성한 물풀과 동행한 농로와 수로. 안타깝게도 콘크리트로 얼룩져 옛 정취야 사라졌으되 가녀린 물길이 숨을 만큼 빽빽한 수초들이 하늘거려 추억에 잠긴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랬다. 오래전 시골뜨기로 놀림을 받으며 쇠뜨기를 꼴망태에 가뜩 짊어진 채 터벅터벅 걸어가던 유소년이 있었다. 마소도 마다하는 잡풀을 뭐하러 뜯어왔냐고 혼쭐나던 그때를 떠올리면 민낯이 붉어지곤 하건만 그런 척박한 사계를 오롯이 품었기에 시심을 간추려 조촐한 책자나마 펴냈는지도 모른다. 곁에 남양호 생태운동본부를 둔 서해안고속도로 통로에서 가진 명상의 시간. 그 순서를 이끈 이경희 님의 나긋한 목소리에는 서로를 위한 사랑과 감사의 주문이 담겨있었다. 실로 소음마저 고요로 삭힐 수 있다면 목하 조화로운 경지에 접어든 참이리라. 지나는 길에서 비켜나 직접 가보진 않았으나 동양척식회사의 창고로 쓰였다는 건물을 보며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니 질퍽한 홍원교를 건넜고 삼계리의 옛 지명인 옹포를 거쳤다. 충청도와 경기도 일원에서 만든 어염, 베, 항아리들이 모여들었는데 저포로도 불리다가 왜인들의 간척으로 물길이 막혔고 남양만에 방조제가 생긴 뒤 뱃길이 끊겼단다. 이윽고 당도한 청북읍사무소 종점. 제법 굵은 빗방울이 일행을 향해 다음 섶길에서 또 보자며 어깨를 토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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