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 대당 교역의 첫 출발지 비단길

[평택시민신문] 섶길은 흩어진 길이 아닌 오붓한 길. 굳이 국어사전을 빌리면 산이나 숲 따위에 난 폭이 좁은 호젓한 길을 가리킨다. 평택섶길 중 ‘비단길’은 그 옛날의 실크로드(Silk Road). 통일신라 전후 대당 교역로로써 경주 – 천안 – 경양포(노양리) - 신왕나루 – 대진(평택항)으로 이어진다. 그 13km 남짓한 오솔길을 신나게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꽃을 피운 건 덤이었다. 길도우미로 나선 임권배 선생님은 다방면에 박학다식했다. 코로나 이후의 지구촌까지 얼마큼 가름할 만치. 평택으로 거처를 옮기자마자 오백리 섶길부터 완주했다는 말이 유창한 영어처럼 그를 대변했다. 기실 몸풀기를 선보이며 자신을 ‘확 찐 자’로 소개할 때부터 그 행보가 궁금해졌다. 알고 보니 평택에 정착한 지는 고작 10개월여. 30년째 살아온 내 얼굴이 머쓱해진 순간이었다. 앞으로 교감이 가능한 한 두고두고 예사롭잖은 그의 발걸음을 눈여겨 보고팠다.

비단길은, 통일신라시대 대당 교역의 
첫 출발인 평택항 옛 교역로 탐방 길

간척과 전쟁 난민 역사 서린 신대리에서 평택호 횡단 국제대교 걷는 길 신선

출발지는 신대2리. 신대(新垈)라는 지명의 유래는 시내 신대동(新垈洞)처럼 ‘새로이[新] 터[垈]를 잡은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다행히 일제강점기 이전 조선 후기에 마을이 새로 생기면서 지어진 이름. 조금 더 들춰보니 신대1~4리의 우리말 이름은 제각각이었다. 1리는 ‘새터’여서 짐작한 대로 새로이 자리를 잡은 터전이겠으나, 2리의 ‘영창마을’과 3리의 ‘장단마을’은 이를테면 난민정착사업소였다. 한국전쟁 때 참화를 피해 경상도 경주와 영천 등지에서, 황해도 장단에서 밀려든 피란민들을 수용한 터라니 금세 풍경이 색달라 뵌다. 그렇게 갯벌과 공유수면을 어렵사리 간척해 이룬 삶의 거점. 가장 흥미를 끈 4리의 ‘말랭이’는 관련 자료를 뒤적여봐도 명쾌한 해설은 없었다. 다만 내 깜냥으로는 여기 땅들이 유독 진흙처럼 말랑거리지는 않았는지, 혹여 어느 분이든 졸고를 훑어보시거들랑 슬며시 짚어 주시압!

이번 길은 목마다 섶길 안내판이 있었다. 요긴한 지점마다 붓글씨로, 목각으로, 표지석에 지극정성을 담아 고이 설치한 손길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린다. 제법 복잡한 교차로를 지나 접어든 곳은 평택국제대교. 넓고 편한 보행로가 단연 돋보였다. 한 차례 떠들썩한 사고를 겪고 난 뒤 과연 제대로 해낼까 미심쩍던 우려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시원한 물바람을 쐬며 다리를 건너니 신왕터널. 저만치 전망대에서 일행을 부른다. 완만한 경사지를 오르다 눈에 띈 의자들. 하나는 망가진 채 볼썽사납게 방치되어있다. 자고이래 옥에 티는 어디서나 티가 나는 법. 막상 쉼터로 가니 배를 닮은 조형물의 설명이 빠졌다. 아름다운 평택의 풍광을 담은 전망공원에 걸맞은 세심함이 태부족해 안타까웠다. 매번 지적하는 항목이로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기보다는 디테일로 승부를 걸면 거꾸로 악마를 이기는 법이다. 놀랍게도 세부사항이 중요하단 뜻이지만 실은 ‘신은 디테일에 있다’로부터 유래한 표현이란다.

팽성 신대리에서 국제대교, 신왕나루, 
마안산을 거쳐 혜초가 중국으로 
구법여행 떠날 때 출발했을 
평택호 혜초기념비까지 13km 여정

옛 신왕나루 알려주는 나룻배 조형물 설명 없어 아쉬워

잰걸음을 이끄는 데는 고등산(高等山). 뫼는 뫼이거늘 도무지 몇 미터나 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시야가 탁 트여 일대 산수가 한눈에 들온다 했더니 이름값을 톡톡히 해낸 터. 150m 등고선으로 이어진 숲속길. 짙은 아카시아향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누군가 여기 개화 시기는 좀 늦는다고 귀띔했다. 느긋이 기다렸다가 뒤늦게 꽃망울을 틔워 길손들에게 향내를 선사한 셈이다. 곧바로 향긋한 대자연이 냄새나는 인간들을 감싸는 이유다. 그리 빚진 자들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발바닥에 와닿는 감촉. 솔잎은 부드럽고 흙길은 푸근했다. 잔가지들이 좀 널브러진들 무슨 대수랴. 발끝에 걸려 넘어지지만 않으면 그만인 것을……. 우린 그렇게 좁다란 산길을 즐거이 걸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산천과 벗하는 공간만치 안온한 시간이 있을까. 아마도 태초에 때 묻지 않은 온누리가 이랬으리라. 다소 과장이로되 뒤에서 혼잣말처럼 되뇌던 몽환적이기까진 아녀도 솔숲이 뿜어낸 내음은 필시 심신을 녹이는 청량제로다.

그때였다. 구겨진 시구가 눈에 밟혔다. 다들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땅에 떨어진 채 버려진 시 한 편. 그러나 아련한 시심마저 저버린 건 아니렷다. 냉큼 주워 찌든 때를 벗기듯 흙을 털고 글씨를 펴서 다독이는 이가 있었다. 이게 바로 시인의 마음일 터. 그래서일까, 거기서 얼마 안 가 소나무와 어깨동무한 선시(禪詩)와 마주쳤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비록 영적인 관점은 다를지언정 풍경을 달고 돌아오는 정호승은 그렇게 읊조렸다. 걸어온 길이 또 그만치 길게 이어지면 얼마나 좋으랴. 못내 아쉬운 듯 걷다가 묵은 밤송이를 까보기도 하고, 솜처럼 푹신한 솔잎새를 만져보기도 하면서, 풀내음에 취해 지나온 숲길을 뒤돌아보았다. 그 끝자락에서 멈춘 발길들. 새까만 묘비석에 새긴 한자를 읽어내느라 저마다 안간힘을 썼다. 이승은 이처럼 살아지건만 저승은 또 어찌 살아낸단 말이더냐? 그 답을 얻지 못하는 한 인생무상을 무한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게 우리네 인생길이다. 세월에 엉겨붙은 풀섶에서 낳고 죽고 시시각각 사라지는 하루살이처럼.

기대치에 어긋난 오찬을 나눈 뒤 정성껏 꾸민 앞뜰에서 유의미한 담소를 이어갔다. 길가에서 만난 관상용 양귀비. 제아무리 화려한들 홀로 도랑가에서 인적을 기다리는 신세로구나. 못다 채운 산길의 정취를 담기 전 들른 곳은 여선재(餘禪齋). 설치미술가 부부가 꾸리는 집이었다. 첫눈에 독특한 외양. 문득 가우디가 설계한 구엘공원이 떠올랐다. 친환경 일품요리는 물론 운치 있는 카페를 곁들인 데다 이따금 라이브까지 연다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격조를 갖춘 내공에 앞뜰을 장식한 소품들처럼 직접 기른 연으로 빚은 연동주가 맛깔스럽다는 입말에 그들의 예술혼도 엿볼 겸 아내와 꼭 한 번 와보리라 맘먹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본 식당과는 본색부터 다르다. 전자가 산만하다면 후자는 정갈하다고나 할까? 여유로움에 풍요로움이 어우러진 땅을 뒤로하고 필자는 흩어진 소요와 고요한 평화로움에 잠겼다.

 

마안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수평선 위 평택호는 ‘절경’

짧지만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는 마안산(馬鞍山). 산자락이 말의 안장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랬다. 푹 퍼진 산길에서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순 없다. 오전에 체감한 작다란 뫼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질감. 그 동행길에서 오간 화두는 인간의 탐욕이 부른 재앙이었다. 해마다 캐나다에서 지구인들이 여는 토론대회의 담론은 앞만 보고 달려온 현세대를 향해 던지는 경고이자 통찰, 곧 지구촌 공동체가 나아갈 지향점이리라. 지독한 바이러스를 겪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세계화를 강제 종료 당하는 일은 전연 예기치 못한 데서 또 터질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묵직한 공기를 헤아렸는지 청설모가 마중을 나왔다. 가이드는 요놈의 귀여운 재롱에 빠져 동영상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나는 남은 얘기를 마저 하고자 기다리다 산중턱을 떴다. 멋없는 정자를 지나치니 이내 꼭대기. 의자에 걸터앉아 마시는 생수는 생명수였다.

해발 112.8m의 표지석. 하지만 땅속에 박힌 돌판은 한사코 산정의 높이를 126m라고 시위한다. 뭣이 맞고 중한지는 관심 밖? 수평선 위 펼쳐진 평택호 조망. 체증이 싹 달아날 만큼 상쾌하다. 바로 이걸 만끽하려고들 기를 쓰고 산을 찾는 참이리라. 덩치 큰 땅덩이를 두고 내려오니 구진마을에 온갖 꽃이 만발했다. 갖가지 꽃들이 길가에 한아름이요 울타리에는 한가득이다. 나는 갈래를 따라 소담스레 피어난 예쁜 꽃들을 빠짐없이 카메라로 옮겼다. 그 종류만 해도 줄잡아 여남은. 막바지 논둑길이 시멘트만 아니었으면 금상첨화가 따로 없을 뻔했는데…. 하기야 어쩌랴. 농사지을 일손이 달려 기계가 아니면 아예 먹거리를 만들 길이 없는걸! 흐뭇한 건 농수로에 흐르는 물길. 거룻배를 띄워 노라도 저어온 걸까. 어느덧 평택호 혜초비였다. 원효길이라 쓴 돌멩이 아래 글월을 보니 예서 원효와 의상이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오밤중 해골물을 마신 뒤 득도해 득달같이 딴 길로 샜다는데 어디까지나 미확인 정보. 미술관 조각품들을 두루 감상한 뒤 집으로 향하니, 이로써 네 번째 섶길 걷기를 마무리한 터였다. 

조하식
수필가 · 시조시인
이충동에 살면서 고등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 시조집, 기행집 등을 펴냈고,
퇴임 이후 기고 활동과 더불어
교육철학 박사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http://blog.naver.com/johash(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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