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리 K-6정문 앞 로데오거리~농성~내리 캠핑장~미군부대 외곽 평택호~신대2리 코스

석양에 저녁노을 지고 둥근달 떠오르면 그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노라고 붙여진 이름이 노을길
미군 부대 확장 때 미군 영내로 편입되는 것
막아 살려낸 소중한 부대 외곽 둘레길

[평택시민신문] 싱그러운 오월의 첫날. 상큼한 바람결이 때 이른 더위를 다독였다. 오백리 섶길 걷기 두 번째 코스는 총 17km의 노을길. 아쉽게도 아내는 몸살 기운이 있어 쉬기로 했다. 가이드는 인상이 서글서글한 안효태 사장님, 맨손체조로 몸을 풀기 전 자작시 한 편을 멋지게 낭독하셨다.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이라는 제하에 행복한 인생의 애틋한 뜻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군데군데 해설이 필요한 데서는 장순범 평택섶길추진위원장님이 수고해 주시기로 했다. 단짝을 집에 놔둔 채 홀로였기에 오늘따라 발걸음이 무거운 건 어쩔 수 없다.

K6 정문에서 곧바로 들어선 곳은 안정리 로데오거리. 상가가 그리 길지는 않으나 가로를 말끔히 정비해 놓고 손님을 맞았다. 그런데 가게주인 한 분이 우리 일행을 보고 마스크를 안 했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지긋지긋할 만치 들러붙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속성상 아직은 방심하면 안 된다는 노파심이리라. 흠칫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막 민가를 벗어났다 싶을 때 고맙게도 전봇대에 써놓은 ‘평택섶길’ 화살 표시가 눈에 띄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텃밭이었을 터전에는 원룸처럼 뵈는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하루아침에 유럽 시골 동네 같은 진풍경을 기대할 수는 없으나 어딜 가나 그렇고 그런 그림에는 나도 모르게 따가운 시선이 머물곤 한다. 차근차근 잘잘못을 따져가며 길을 내고 집터를 닦으면 오죽이나 좋으랴.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한 가지 제안하면 행안부든 문체부든 해마다 아름다운 마을을 선정해 기금을 조성해 주거나, 사전에 치밀하게 짜놓은 동네 가꾸기 묘안을 심사해 팍팍 밀어주는 거다. 평소 국내외를 쏘다니며 나름은 생각한 바이니 참고하시면 어떨지 제발 난개발은 이제 그만!

 

미군으로 인해 줄지어 늘어선 원룸촌, 난개발은 이제 그만

이를 상쇄라도 하듯 따뜻한 눈길이 머문 곳이 나왔다. 가까이 살면서도 의외다시피 아는 이조차 드문 평택 농성(農城). 지지난해 겨울 들렀을 때는 실눈이 살짝 덮여있었는데 지금은 금잔디가 파릇파릇 실눈을 뜬 채 길손을 맞았다. 한눈에 논 한가운데 왜 흙으로 작다란 규모의 성을 쌓았을까? 장선생님의 차분한 해설이 이어졌다. 삼국시대에 마을 주민들이 들끓던 도적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설을 비롯해 신라 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임팔급(평택임씨 시조)이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과 고려시대에 서해안에 출몰하던 왜구를 막아내려고 쌓아올렸다는 설이 있단다. 학술적인 추정은 이런 토성의 경우 대부분은 국가 형성 초기 단계에서 나타나는 형태로써 지역 토착세력 집단이 생활 근거지로 축성한다는 것. 더울 때는 찬물이, 추울 때는 미지근한 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었다는 얘기로 보아 중앙에는 소나무 대신 옛집이 자리했을 터다. 동문에서 올라 약 300미터 정도의 둘레를 돌아 서문으로 내려오며 약 4미터 높이의 단면을 보면 고운 찰흙을 다져 판축(版築)한 흔적이 뚜렷하단다. 1981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한 팻말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발길이 한결 가벼워졌다.

길가에 노란 천막이 보였다. 무급휴직철회 철야농성 35일째. 트럼프의 꼬장은 여기서도 독성을 뿜어댔다. 관상용이로되 철조망 주위를 장식한 양귀비처럼. 시야를 멀리하니 어깨너머로 드넓은 미군부대가 한껏 거만함을 드러낸다. 마침 여기 사정에 밝은 분에게 들으니 어떤 일이든 대충 때우는 법이 없단다. 싫지만 큰소리치는 근거는 있는 셈일까. 잘 둘러친 긴 담장을 끼고 접어든 곳은 매실 과수원길. 아뿔싸, 발밑에 풀꽃이 밟혔다. 고대 뉘우치듯 옷깃을 여민 채 쭈그리고 살펴보니 어느새 활짝 피어난 냉이꽃 사이로 쑥쑥 웃자란 쑥들이 반갑다고 손짓한다. 그 틈새를 비집고 납작 엎드린 토끼풀은 뜻밖에 행운이라도 몰고 올 듯 소담한 꽃송이를 삐죽 내밀며 뭇 손길을 기다렸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놔두면 이리 좋은 걸 왜들 천지 분간을 못하고 마구 설쳐대는지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자강불식 심장에 새기며 걷는 미군부대 외곽길

한창 꽃단장을 마치고 선보인 데는 내리캠핑장 문화공원. 산책로가 다소 딱딱하다 싶었는데 눈앞에 그럴싸한 풍광이 펼쳐졌다. 정성껏 가꾼 솔숲도 그렇거니와 열두 폭 병풍처럼 맑은 물길이 바로 곁을 적시고 있었다. 삼삼오오 캠핑족들이 노동절을 즐기는 사이 우리 팀은 넓은 잔디광장을 지나 유유히 흐르는 안성천 물결을 따라 섶길 걷기를 계속했다. 자전거도로를 겸한 둑길은 원래는 흙길이었단다. 그렇다면 이 또한 쓸데없는 짓을 벌인 거 아닌가. 천만다행한 일은 막무가내 갑질을 일삼는 주한미군 측에서 여기마저 영내로 고집하는 걸 가까스로 막아냈다는 후일담. 순간 간담이 서늘할 만큼 끔찍한 뇌파가 꿈틀거려 애써 추슬렀다. 이 일대를 아예 물놀이터로 꾸며 독차지하겠다는 심산이었다니 자고로 나라든 개인이든 힘이 없으면 자나깨나 자강불식(自强不息)을 심장에 새길 수밖에.

씁쓸한 뒷맛을 씻어준 건 물가에서 맘껏 자라난 멧버들 군락이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으니 이처럼 걸작품이 되어가는 게다. 참 오랜만에 보는 정경. 이내 가슴은 이토록 뛰놀건만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건 집에 누워있을 아내였다. 조만간 날을 잡아 둘이서 걸을 상상을 하며 사진을 여러 컷 찍었다. 차곡차곡 나의 앨범은 또 그렇게 추억을 쌓아가는 중……. 때마침 저만치 나란히 걷는 이들이 보였다. 부대 외곽으로 둘레길을 원처럼 조성해놓았다. 게다가 옆구리에는 생태 늪지가 있어 물어보니 일부러 만든 저류지라고 했다. 흡사 첨탑처럼 세운 튼실한 물탱크도 모자라 유사시에 대비하려고 덤으로 물을 저장하는 터. 자주 얄밉기는 해도 행실에 빈틈이 없으니 이건 본받는 게 마땅하다.

섭씨 28도를 웃도는 초여름 날씨. 하지만 시원한 물바람을 맞받으며 걸으니 내리쬐는 햇볕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온난화로 인해 불러온 폐해를 떠올리면 응당 팬데믹의 파고를 슬기롭게 타고넘어야 하거늘, 이 지경에서도 뼈아픈 교훈을 잊고 또다시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아간다면 백약이 무효인 미래를 예약하는 꼴이 아닌가?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병리적 상황을 하나둘 진단하다 보니 자연스레 저출산 문제로 화제가 이어졌다. 작년 합계 출산율이 고작 0.92, 세계 최저라는 통계치와 함께 올해는 0.89 아래로 떨어질 거라는 심히 우울한 전망. 젊은이들의 불안한 일자리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뾰족한 수야 있으랴마는 미구에 인구가 반 토막이 난다는 경고를 쏟아내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낯빛들이다.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 청일전쟁터

이래저래 버거운 현실을 달래줄 만한 노익장이 계셨다. 내년이면 팔십이라는 말씀이 믿기지 않을 만치 젊은이들을 앞지르셨다. 작년에 손자와 함께 800km에 달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31일 만에 완주하셨다는 말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니 제주올레 425km쯤이야 산뜻한 발품이렷다. 놀랍게도 오륙도해맞이공원에서 통일전망대까지 총 길이 770km에 이르는 해파랑길을 달랑 3주 만에 주파하셨다니 존경스러운 건 당연지사. 일행 한 분이 날 보고 장래 당신의 모습이라는 덕담에 덩달아 소망을 품어본들 어찌 녹록한 일이랴. 하지만 기어코 해내고야 말리라. 시간에 쫓겨 미처 둘러보지 못한 섶길들은 물론 멀리 남미의 갈라파고스까지.

조하식
수필가 · 시조시인
이충동에 살면서 고등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 시조집, 기행집 등을 펴냈고,
퇴임 이후 기고 활동과 더불어
교육철학 박사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http://blog.naver.com/johash(블로그)

석양에 저녁노을이 지고 둥근달이 떠오르면 그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노라고 붙여진 이름이 노을길. 군데군데 배수문이 있긴 해도 열길 물길 속은 더욱 투명했으면 좋겠고, 당차게 구상하는 황포돗배를 하루빨리 띄웠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그 뱃전에서 향토 가수 정태춘이 뭉툭한 노래비에 담은 그 가사를 시처럼 역사처럼 읊조린다면 무얼 더 바라리오. 그러고 보니 목하 이 땅이 대추리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곤지나루로 불리던 포구였단다. 먹거리를 찾아 출몰하던 왜구와 되놈들이 싸우며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로 회자되던 청일전쟁터였다니, 그러니까 시방 우리는 사방으로 통하는 해상관문을 바지런히 밟아온 참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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