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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계엄군 최초 증언자 효덕교회 이경남 목사“5.18 당시를 기록하겠다는 마음이 늘 있었다”
안노연 기자 | 승인 2020.05.20 11:12

[평택시민신문] 5.18 민주화운동 당시 11공수여단 소속 진압군으로 광주에 투입됐던 이경남(64) 효덕교회 목사는 1999년 <당대비평> 겨울호에 ‘20년 만의 고백-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를 기고하면서 5.18에 대한 증언을 시작했다. 계엄군으로서는 최초의 양심고백이자 증언이었다. <평택시민신문>은 올해로 40주년을 맞은 5.18 민주화운동의 아픔과 의미를 기억하고자 지난 14일 이경남 목사를 효덕교회에서 만나 ‘80년 광주’ 이야기를 들었다.

 

평택에서 목회를 한 계기는

둔포가 고향이다. 부친이 평택에서 목회를 하셨고 나 역시 평택중학교를 나왔다. 나중에 부친이 은퇴한 2000년 이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평택에서는 참여자치시민연대와 쌍용차 시민대책위원회 활동을 하기도 했다.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동기는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김동길 박사, 안병무 박사, 문익환 목사, 함석헌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 70년대는 사회 일각에서 민족운동과 민주화운동이 시작되던 시대였다. 그 운동은 교회에서 시작됐다. 대부분 개신교 인사들이 민주화의 기치를 들었다. 사상계 발행인이던 장준하 선생도 목사의 아들이었고 본인도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 공부를 했던 사람이다. 그들이 쓴 책과 잡지를 읽고 사회의식에 눈을 떴다.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보다 개신교가 가진 진취적이고 정의로운 기상에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신학대에 갔다. 신앙적으로 사적 동기보다 사회적 동기가 강했다.

 

당시 수기를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82년 2월 제대를 하고 학교에 복학해 학업을 마쳤다. 당시 신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농어촌의 미자립교회 등 작은 교회로 파송됐다. 그러다 보니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5.18 당시 경험한 것을 기록해야겠다는 마음이 늘 있었다. 전두환씨와 노태우씨를 엄정하게 심판해 역사와 정의를 바로 세웠어야 했는데 1999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이들을 사면 복권했다. 공화당‧민정당‧민자당으로 이어진 보수 정치세력과 그들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강하다 보니 단호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신군부 세력이 기가 살았다. 그해 전씨는 합천 해인사에서 시국 강연을 했다. 장세동 등 민정당계 인사들도 재기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그것이 너무 싫었다. 강원도 횡성에서 혼자 곰곰이 과거를 회고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발표과정에서의 어려움은

완성된 원고를 여러 언론사에 보냈으나 아무 곳도 받아주지 않았다. <한겨례>도 받아주지 않았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에 참여했던 문부식씨가 편집인으로 있던 <당대비평>에 원고를 보냈다. 그 사람은 내 글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너무 좋은 글을 보내주었다며 문부식씨가 직접 찾아왔다. 당시 <당대비평>은 국가폭력에 대한 특집을 기획하고 있었다. 노근리 사건은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베트남 양민학살은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5.18은 내가 썼다. 이를 계기로 2000년 전태일문학상에 회고록을 공모했다. 전태일재단에서는 이미 발표된 글이기 때문에 문학상을 주기 어렵지만 너무 좋고 중요한 글이기 때문에 관례를 깨고 문학상을 시상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글이 신문과 방송에 알려지게 됐다.

 

투입 당시 상황을 말해달라

11공수여단 소속으로 강원도 화천에 있다가 이동 명령을 받았다. 춘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김포에 있는 1공수여단에서 대기하던 중 17일 저녁 8시 출동명령을 받고 서울 동국대학교에 갔다. 동국대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18일 오후 광주로 이동해 19일 새벽 2시 광주에 도착했다.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이후 시내 진압 작전에 투입됐다. 21일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의한 첫 발포가 발생하고 우리는 시민들에게 포위되었다. 저녁 7시경 조선대학교를 탈출해 무등산으로 이동했다. 주남마을에서 24일까지 3일을 머물면서 식량과 무기를 보급받고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던 도중 송암동에서 광주보병학교 매복조와 오인사격으로 교전을 치렀다. 11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3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때 나도 중경상을 입고 후송돼 9개월을 병상에 누워있었다.

 

특전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당시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내리고 군인들을 동원하며 대학생들을 쉽게 막을 것으로 봤다. 79년 부마사태 당시 3공수여단을 투입해 진압한 전력이 있으니 자신감을 가진 것이다. 특전사들은 프라이드가 있었다. 쉽게 말해 “우리가 가는데 감히 어떤 놈들이 데모를 하겠냐”는 생각이다. 특전사 부대원들은 학생들이 데모해봤자 라고 생각하며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광주에서 투석전 등 저항이 벌어지니 화가 났을 것이다. 데프콘(전투준비태세) 3단계가 발동돼 외출‧외박도 못하는 상황에서 대학생들은 팔자가 좋아 데모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대학생과 계엄군 모두 동년배인데 자신들은 군대에서 고생하고 그들은 좋은 부모를 만나 대학교에서 미팅도 하고 축제도 한다고 생각하니 개인적인 감정에서 더 무자비하게 보복했을 것이다. 당시 현장에서 계엄군을 보며 이런 내면적 요인이 작용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2018년 정부가 계엄군 성폭력을 인정했다

5월 19일 특전사들이 광주시내에 들어가 진압 작전을 벌였다. 정말 난폭하게 했다. 광주 시내 전체가 군인들에 의해 쑥대밭이 됐다. 군인들이 어디든 들어가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다 보니 광주시가 5월 19일 저녁 6시에 새마을방송을 통해 통금을 밤 9시로 당겼다. 당시 사람들의 통금은 늘 자정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이나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사람들은 통금시간을 평소대로 생각했을 것 아닌가. 계엄군 10명이 한 단위로 분산돼 학생들을 체포하는 일을 벌였으니 수천 명의 군인들이 밤새 광주 시내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가. 정황상 수색하던 하사관 중 나쁜 놈들이 그런 짓을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헬기 사격 여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전일빌딩에서 발견된 탄흔은 5월 27일 진압 작전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이미 탱크까지 동원해 전투가 발생한 상황인데 무엇은 못하겠는가. 다만 21일 전일빌딩에서는 헬기 사격이 없었다. 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전기를 메고 전일빌딩에 있었다. 고 조비오 신부는 21일 성당에서 나오다 헬기에서 사격하는 소리를 듣고 두려웠다고 이야기했다. 전두환씨는 “헬기 사격이 없었다”며 조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자서전에 써 지금도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이 벌어지고 있다. 조 신부가 들은 21일 총소리는 시민들을 흩어놓기 위해 광주천에 가해진 사격일 것이다.

(고 조비오 신부는 1989년 국회 광주진상조사특위 청문회에서 21일 헬기가 사격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또 당시 김주호씨로부터 헬기 사격으로 광주천 좌우에 있던 시민 20명이 총탄에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전 주한미군 방첩 정보요원이었던 김용장씨도 5월 21일 UHIH 소형 헬기가 도청 주변에서 M60 기관총을 사격한 사실을 보고한 바 있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505보안대 대공수사과장이었던 서의남씨가 전남도청 2층에서 헬기 사격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현장 발포 명령자는 누구였는가

발포명령자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5.18과 관련해 국가에서 9번이나 조사했는데 이번 조사에서 나올 것이라 보지 않는다. 전장에서 발포 명령은 문서가 아니라 구두로 내리기 때문에 증거가 있을 수 없다. 21일 오후 12시 30분 11공수 63대대 권아무개 병장이 무전으로 발포 명령을 받았고 차아무개 대위가 실제로 행동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24일 송암동 교전으로 사망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어느 부대 누구에게 무전을 받았는지 알 수 없고 발포 명령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21일 오전 10시 50분 전두환, 노태우, 이희성, 진종채 등이 국방부장관실에서 모여 군 수뇌부회의를 열었다. 그곳에서 자위권 발동 명령이 내려졌는데 이것이 사실상 발포 명령이다. 그놈들이 18일 군인들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패놓고 시민들의 저항이 격화되자 자위권이라면서 발포 근거를 만들었으니 그 책임이 크다.

(김용장씨는 21일 전두환씨가 헬기를 타고 점심시간 전에 광주에 와 특전사령관, 보안사령관 등과 회의를 했다고 증언했다. 서의남씨도 전씨가 헬기를 타고 광주에 내려온 적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종자의 행방을 밝힐 수 있다고 보는가

실종자는 공식 인정을 받은 사람 84명을 포함해 242명이다. 작년에 전 505보안부대 특명부장인 허장환씨가 실종자 문제에 대해 양심선언을 했다. 당시 505부대가 중심이 돼 시신을 소각하고 남은 시신은 비닐에 싸 바다에 투기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3공수, 7공수, 11공수는 작전부대이기 때문에 현장상황도 모르고 시신처리를 할 수 있는 부수적인 장비도 없었다. 이런 일은 다 보안사가 한 짓이다. 당시 보안사는 광주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특수임무란 정보 수집, 사건 조작, 시신처리 등이다. 보안사 기획처장, 치안본부 조정관 등이 벌인 일이다. 국가수사기관에서 이들을 붙잡아 강제로 조사한다면 답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지난 18일 제40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진상 규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기 위해 이제라도 용기를 내어 진실을 고백한다면 오히려 용서와 화해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을 강하게 요구했다. 넓게 보면 시민군도, 명령에 따라 진압에 투입된 계엄군도 모두 국가폭력의 피해자다. 국가폭력의 진상을 밝히고 올바른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이경남 목사와 같은 증언자들이 더 많이 나오길 바라며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한다. 

안노연 기자  webmaster@pt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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