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균
평택대 미국학 교수

[평택시민신문] 선거전이 한창이다. 4년 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우리 정치의 문제점이 더욱 많이 눈에 뜨인다. 선거용 정당이 하루아침에 급조되었고 대부분의 정당에서 후보 공천을 둘러싼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당파적 실리 챙기기에 모든 정당이 함몰된 정치 현실 속에서 유권자의 권리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러나 이런 것이 우리만의 문제일까?

1800년 대선에서 미국은 유래 없는 혼탁한 선거전을 경험했다. 현직 대통령이던 존 아담스(John Adams)와 현직 부통령이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맞붙은 선거였다. 두 사람은 1796년 대선에서 이미 싸운 경험이 있었다. 첫 대결에서 아담스가 제퍼슨을 누르고 대통령이 되었고, 제퍼슨은 차점자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미국 대선제도는 선거인단 표의 과반수를 득표한 후보자들 중 최다 득표자가 대통령이 되고 그 차점자가 부통령이 되었다. 정당이 존재하지 않아 정당의 후보라는 개념도 아직 없었다.

1788년과 1792년 대선에서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때만 해도 대선방식에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워싱턴이 은퇴하면서 미국의 정치 현실이 바뀌었다. 1796년 대선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이 된 아담스와 제퍼슨은 정치적 입장이 달랐다. 아담스는 연방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연방주의자(federalist)였고 제퍼슨은 그에 반대하여 주정부의 권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권주의자(state rightist)였다.

1800년 대선에서 아담스와 제퍼슨이 다시 맞붙었는데 이번에는 제퍼슨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기존 선거 방식에 따르면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고 아담스가 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제퍼슨은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같은 애론 버(Aaron Burr)를 부통령에 당선시키는 선거전을 기획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자신은 대통령 후보가 되고 버는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800년 대선 결과는 제퍼슨과 버가 선거인단 표 중 73표씩 획득하였고, 아담스는 65표를 얻어 3위를 차지했다. 아담스를 부통령 자리에서도 낙선시킨 것은 제퍼슨이 원하는 바였다. 그런데 동점인 제퍼슨과 버는 하원에서 결선투표로 대통령과 부통령을 가려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하원 결선투표에서 제퍼슨은 문제에 봉착했다. 1주가 1표씩 투표하는 하원에서 연방파가 제퍼슨 대신 버를 대통령으로 강력하게 지지했다. 35차례나 투표를 실시하였으나 하원의 과반수 표를 둘 다 얻지 못했다. 과반수를 얻는 후보자가 나오지 않으면 대통령 없이 새 정부가 출발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었다. 연방파인 아담스 행정부의 국무장관이 대통령 대행으로 국정의 책임자가 될 수 있었다. 하원 결선투표는 연방파의 도움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한 인물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었다. 해밀턴은 연방파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고 제퍼슨과는 정치적 대척점에 서 있었다. 해밀턴은 고민 끝에 버 보다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해밀턴은 제퍼슨의 정치 철학이 연방파와 달라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밀턴은 어떤 정치 철학도 없이 단지 사익이나 챙기려는 사이비 정치인인 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해밀턴 덕분에 제퍼슨은 36차 하원 투표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버는 부통령이 되었다(미국 의회는 1803년 수정헌법 12조를 통과시켜 대선제도를 개선했다).

이제 우리 선거를 다시 생각해 보자. 이번 선거에서 정치권이 보여주는 우리의 정치 현실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이런 정치 현실에서 투표한다는 것 자체에 회의가 생긴다. 하지만 투표를 포기한다고 우리 정치의 발전이 저절로 이루어질까? 대신 투표장에 나가 해밀턴의 선택을 생각하며 사익보다는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후보를 찾아보기로 하자. 그리고 다음 국회에서는 선거제도의 개선책이 나오길 기대해 보자. 두 가지 모두 어려운 문제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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