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과 함께 한 평택의 독립운동가 남상환 선생

수진농조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남상환 (1932년)

4월 19일에 순국한 독립운동가 남상환 선생의 청년정신

[평택시민신문] 독립운동가 남상환(1908∼1933)은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2007년 대한민국 정부는 늦게나마 선생의 항일정신을 기려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서정리 지역에 기반을 두고 언론운동, 소년운동,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실천하다가 불꽃같은 삶은 마쳤다. 그가 일제강점기 평택지역의 대표적인 농민투쟁인 수진농조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순국한 날이 4월 19일이다. 우리 현대사에 4.19 혁명으로 기억되는 그날 남상환은 조국 독립의 기쁨도 채 느껴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남상환과 같은 항일운동기의 청년정신이 있었기에 조선은 마침내 독립했고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에 성공하며 선진국의 꿈도 이뤘다.

 

양주에서 서정리로 이주 서정리소년회에서 활동

독립운동가 남상환은 양주군 별내면 퇴계원이 고향이다. 1924년 서울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정리에 정착했다. 서정리와 관련한 남상환의 활동이 언론 자료를 통해 처음 확인되는 것은 1927년 8월 10일 서정리 소년회 창립총회에 서기로 활동했다는 내용이다. 이 시기는 1927년 2월 15일 안재홍, 홍명희 등의 주도로 전국 120여개 지역에 지회가 하나씩 설립되던 시기였다. 그해 8월 서정리에 김봉렬, 이호 등과 함께 남상환이 소년회를 창립했다는 것은 신간회 운동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남상환은 서정리 소년회를 통해 꾸준한 어린이 계몽운동을 전개한다.

일제강점기 진위군에 있던 일본인 농장 (이종학 소장 사진)

1929년 서정리에서 노조 창립하고 노동운동에 힘써

남상환은 1929년 12월 19일 100여 명의 노동자와 함께 서정노조를 창립하고 상무집행위원장으로 노동자의 권익보호를 위해 힘쓴다. 1930년 2월 1일에는 조선일보 기고를 통해 당시 진위지역에 사회단체가 없음을 한탄하고 야학 이외에 활동이 미미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청년의 각성을 촉구했다. 남상환의 이 글로 보아 당시 신간회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인근 안성, 천안, 수원, 아산 등 각지에 신간회 지회가 설립된 것과 달리 신간회 창립의 핵심인물이었던 안재홍의 고향 진위에서 신간회진위지회가 설립되지 못한 당시의 열악한 사정을 추측할 수 있다.

제군아! 과거는 과거라치고 현재의 진위(振威)를 살펴보자. 사회단체가 있는가? 없는가? 실로 한심하다. 우리 진위에 기미 이후로 진위청년회, 평화청년회, 서정리소년회, 진흥소년회, 부용소년회, 진흥소년구락부 등 각 단체가 봉기하였으나 사회에 머리 되는 청년회부터 거대한 빈 건물에 간판만 걸려 있고 야학을 경영하는 이외에는 아주 수면상태에 있다.

또 이번에 조직된 서정리노동청년회는 회관이 없서서 이리로 저리로 집회일이면 곤란이 크다. 이제부터 각성하라. 우리의 진위(振威)라는 두 문자를 생각하고 우리의 책임이 중대하니 우리는 약자다. 지체말고 단결하자! 그리하야 민족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야 활동하며 분투노력하자! (조선일보 1930년 2월 1일자 6면)

 

1930년 조선일보 평택지국 기자로 활동하며 약자 보호에 힘써

남상환은 22세 되는 1930년 5월 평택역에 위치한 조선일보 평택지국의 기자로 활동한다. 그해 어린이 날에는 서정리시장에서 열린 어린이날 축하 행사에 서정소년회 집행위원으로 어린이 권익보호에도 노력한다.

그해 6월 28일 평택에서 경기기자대회가 평택역 진위청년회관에서 열렸다. 남상환은 율포리 출신의 심인택, 신간회 수원지회를 이끈 박승극, 신간회 광주지회장을 지낸 유인목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날 언론 출판집회 자유 획득, 전조선기자대회, 사회실정조사에 관한 의제를 논의했다. 그해 7월에 일제는 남상환을 소환 어린이날에 어린이날 노래를 당국의 허가없이 어린이에게 배포했다는 이유로 소환 장시간 취조했다.

이 일 오전 열시 경에 본보 평택지국에 있는 서정노조집행위원장 남상환 씨를 소환하여 약 여섯 시간에 지리한 심문이 있은 후 서장의 훈계 방면으로 동일 오후 네시 삼십분 경에야 돌려보냈다는데 그 자세한 바를 들은즉 지난 『어린이날』에 『어린이날』 노래를 당국의 허락없이 어린이에게 등사 배부하였다는 것과 그 날에 무슨 가나 부르지 않았나 하는 의심으로 그와 같은 심문이 있었다 하며 역시 사상에 대한 주의를 하고 돌려보냈다 한다(조선일보 1930년 7월 5일자 7면).

남상환 조선일보 기고글 (1931년 2월 1일자)

수진 농조 창설, 농민 교양과 생활 향상에 힘써

남상환은 1930년 3월 경기도 수원, 진위(현 평택)를 중심으로 한 수진농민조합을 창설하며 농민운동 전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수진농민조합은 ‘농민의 이익획득과 생활향상, 농민의 문맹퇴치와 의식적 교양, 농민의 상호부조와 확고한 단결’을 내걸고 합법단체로 출범했다. 그러나 수진농민조합은 단순히 농민의 권익확보에만 나선 것이 아니라 수원청년동맹과 신간회 수원지회 해소 이후 수원지역 민족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남상환은 수원진위지역 농민운동조직인 수진농조 쟁의부장으로 순사를 대동하고 출장나간 장려지도원이 농민이 심은 모를 강제를 뽑아 버리는 횡포를 조사하고 진위군 농회장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1930년 7월 24일 남상환은 조선농민총동맹에서 함께 기자 활동을 했던 유인목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조직은 당시 조선의 30개 농민조합단체가 모여 결성된 것으로 22,000명이 참여하는 전국 조직이었다.

 

서정리 지역 가난한 아동과 부녀자의 문자보급운동 활성화에 힘써

1931년 남상환은 당시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과 문화부장 장지영 등이 주도 했던 문자보급운동이 평택 서정리 지역에서 정착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이 진위군 장안리는 가난한 아동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태어났으니만큼 그의 적절한책임이 있으니 밥에 주리고 배움에 굶주린 어린이들을 가르쳐줌이 나의 의무임을 더한층 결심하였습니다. 지난달 이십오일부터 백 이십명의 가난한 아동을 모으고 특히 부인 이십 명을 모으고 개시하였습니다. 귀사 평택지국 기자이신 남상환 선생의 금일까지의 사회운동 더구나 소년운동으로 체험하신 민활하고 굳센 지도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자신 있는 방향을 걷게 하여 줍니다(조선일보 1931년 8월 18일 4면). 

서정리에서 열린 남상환 장례식 (동아일보 1933년 5월 2일자)

수진농조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투옥, 보석중 지병으로 서거

수진농민조합은 점차 혁명적 농민조합으로 전환하며 소작쟁의를 주도하는 한편, 일본 제국주의의 타도를 목표로 농민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갔다. 수진농민조합을 이끌던 남상환은 박승극, 김영상 등과 수진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여 소작쟁의를 주도하였으나, 이를 빌미로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중 3월 21일에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지병이 악화되어 한 달 후인 4월 19일 서정리 자택에서 서거했다. 4월 21일 남상환의 장례식에는 사회운동에 함께했던 600명의 동지들이 참석했다.

 

서정리와 소중한 인연이 있는 남상환과 안재홍의 항일운동 널리 알려야

앞서 살펴 본 것처럼 남상환은 서정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청년독립운동가였다.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어린이, 여성, 노동자, 농민 등 소외 계층의 권익보호에 일생을 바쳤다. 안재홍과는 조선일보 주필과 평택주재 기자라는 인연으로 만나 신간회가 추구했던 문맹퇴치, 언론자유쟁취, 노동자 농민권익 보호 등을 함께 실천했다. 안재홍도 강연과 기고를 통해 농민의 빈곤문제 해결, 농민교육의 중요성과 농민대학 설립 등을 강조했다. 안재홍이 경향각지를 다닐 때 자주 이용했던 역이 서정리역이었다. 언론사 간부와 기자로 안재홍과 청년 남상환은 서정리에서 만나 함께 언론과 문자보급운동, 농민문제 등 시국에 대해 함께 고민하기도 했을 것이다. 서정리와 소중한 인연을 가진 독립운동가 남상환과 안재홍의 항일 활동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끝.

황우갑 시민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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