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두움 그 경계에 선 인간의 선택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新世界』를 처음 접했을 때의 생소함과 놀라움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알파, 베타, 감마족 등 철저하게 구분된 인간들이 인공적으로 대량 생산되고 그들은 끊임없는 세뇌를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기계처럼 답습하여 살다 필요에 의해 폐기 처분되는 하나의 소모품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품 같은 삶을 살던 헉슬리의 상상의 산물이 어쩌면 어느날 현실이 되어 인류 앞에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진실로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2003년 2월 이브라는 복제아기가 탄생했다고 발표한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분신을 세상에 존속시키려는 열망과 자신의 삶에 집착하는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 동양의 절대권력자 진시황은 영생불사를 꿈꾸며 불로초를 찾아 헤매었고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또 다른 방식의 영생을 꿈꾸며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어 거대한 피라미드에 안치시켰고 최초의 냉동인간이 된 미국의 베드퍼드박사 이후로 과학의 진보가 가져다줄 영생불사 내지는 제 2의 생을 꿈꾸며 냉동되어 있는 사람수가 미국에만도 30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그들이 꿈꾸는 영생불사나 제 2의 삶은 실현될 것인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과학이 더 발달하면 완전한 정신의 모방까지는 아니더라도 겉모습의 인간만큼은 생명을 연장할 시기가 올 것이다.
유전자의 비밀이 밝혀지고 인간 게놈지도가 해독되고 생명공학이 놀랍게 발달하면서 복제 동물들이 영국을 비롯 곳곳에서 선보였고 대담하게 인간 복제를 선언한 의사, 과학자, 사이비 종교 단체에 이르기까지 신의 고유 영역으로 여겨지던 생명을 복제하는 일에 관심을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달하여 또 다른 나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만나게 된다면 난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인간복제, 그 빛과 그림자
ⓒ2004 출판사 궁리
<『인간 복제』그 빛과 그림자>라는 글을 통해서 저자는 복제 인간에 대한 일반인들의 그릇된 시각과 오해 전문가들의 긍정적 시각과 부정적 시각에 대한 견해 및 저자의 견해를 통해서 득(得)과 실(失), 허(虛)와 실(實)을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는 복제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지는 오해를 풀어주기 위한 친절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세포 분할을 통한 생명의 탄생은 여러 쌍둥이를 생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체세포를 통한 복제만이 유전자와 형질이 모두 같은 분신 복제의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처음 복제의 시도는 줄기세포를 얻거나 인간에게 필요한 특정 성분을 대량으로 얻기 위한 것이었고 현재도 어느 선까지 생명의 복제를 허용할 것인가를 두고 찬반양론(贊反兩論)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기술이 개발되어 있는 한 법(法)의 한계를 넘어선 기술의 활용은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으며 그 기술을 활용하는 과학자들과 그 기술의 은택을 누리려는 인간 모두에게 윤리(倫理), 도덕적 이해(道德的 理解)와 교육(敎育)이 선행(先行)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고 인간의 지적(知的) 호기심은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한번 맛본 호기심을 잠재울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기심이 사라진다해도 누군가는 또 다른 호기심으로 미지의 영역을 넘나들며 호기심을 충족시키려 할 것이다.
현재로선 인간 복제는 불가능하며 많은 풀어야 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비록 자기 복제는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세포를 이용 줄기세포를 배양하여 여러 가지 불치병 치료에 사용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고 언젠가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경이적인 체험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세상에서 만나는 또 다른 나의 정체성(identification)은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사유의 세계와 자기만의 경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쌍둥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사유의 세계는 동일하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20대, 40대, 혹은 60대에 나를 복제한다고 상상을 한다면 그가 복제하는 순간 성인인 나와 같은 상태로 성인으로 복제되는 것이 아닌 이상 처한 환경, 사유의 세계의 상이함으로 인해 아마도 나와는 다른 내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그 이질감이 몹시도 당혹스러울 것이고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복제를 통한 또 다른 고통을 맛볼 필요가 있을까?
예를 들어 자기가 사랑하던 자녀가 기형이어서 완전한 자녀로 복제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순간 이미 기형인 자녀는 부모에게서 버림을 당하는 셈이다. 연인이나 부모, 자녀, 사랑하는 이들을 영원히 곁에 두고 싶다는 것은 단지 이기심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살아있는 동안 질병의 치료를 위한 방법이나 대처법을 모색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많은 종교계 인사들과 환경단체, 도덕적 가치 우위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음에도 결국 인간은 편이성과 유익을 좇아 기술을 사용하여 불치병을 치료하게 될 것이며 인류의 생명은 연장될 것이고 젊은 노령들이 다른 가치관을 지닌 실세의 젊음들과 갈등하는 시기가 올 것이다.
저자와 많은 과학자들의 전망과 같이 인간은 끊임없이 신의 영역에 반기를 드는 행위를 계속할 것이고 지식과 자본과 기술이 결합되어 맞춤 아기나 자신이 원하는 인간을 복제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과학과 과학자가 있는 한 새로운 시도와 연구는 지속될 것이고 인간이 모두 윤리 도덕적인 사고를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아니기에 도덕과 인륜을 무시한 채 생명공학이나 유전공학 기술이 남용될 소지는 충분하다.
빛과 어두움 그 경계에 선 인간의 선택
그렇다면 어떤 시각으로 인간 복제를 바라보고 또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저자는 원칙적으로 인간 복제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인간 복제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다른 방법을 통해 자신들의 욕구를 잠재울 것을 역설한다.복제된 인간이 정신과 육체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같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그렇다면 복제 인간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의미(意味)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책에서 인용했듯이 연인이 불치병으로 죽어서 그 연인을 복제한다고 했을 때 복제를 원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연인의 겉모습을 그대로 닮은 어린아기에 불과할 것이며 환경와 조건에 따라 연인과는 다른 경험과 사유를 지닌 인간으로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히려 배아줄기 세포를 통해 현대의 불치병을 치료하는 선에서 과학이 활용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시험관 아기 탄생 이후 많은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인공 수정을 통해 자녀를 얻고 그것이 아무런 장애 없이 인간에게 받아들여 진 것처럼 동물 복제나 인간 복제가 아무런 충격 없이 기술의 일면으로 받아들여질 시기가 오지 않을까 전망한다.
아마 그런 시기가 온다면 가진 자들은 가장 이상적인 아기를 맞춤으로 가지려 할 것이고 이상적인 생존 환경과 교육 환경을 제공 할 것이며 인류는 겉모습만이 아닌 지적인 측면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