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과 함께 한 평택의 독립운동가 권태휘 선생

안재홍과 함께  1938년 다산 정약용 <여유당전서> 발간에 크게 힘써
민세와 함께 신간회 운동, 조선학운동,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참여

[평택시민신문] 

안재홍과 고향 후배 권태휘 , 절대 독립과 통일국가수립에 함께 협력해

독립과 통일국가 수립에 안재홍과 협력한 권태휘 선생

평택의 민족지도자 민세 안재홍의 별명은 다사가(多事家)였다. 일이 아주 많았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보편적 공익에 헌신했던 지도자였다. 그가 전국적 규모의 조직에 관계했던 단체는 70여개가 넘었다. 그 가운데 학자로서 안재홍이 이룬 최대 업적 가운데 하나가 다산 정약용 선생의 문집인 <여유당 전서> 교열 간행이다. 민세는 친구 위당 정인보와 함께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다산의 문집을 1934년∼38년에 걸쳐 정리해 다산을 한국 실학의 최고봉으로 재조명했다.

평택 고덕면 안재홍 고택은 1934년 이후 민세가 낙향해 다산 재조명과 한국 고대사 연구에 일가를 이룬 조선학운동의 산실이다. 조선학은 민세학으로 구체화되었고 민세학은 평택학의 중심이다. 일제강점기 최대 출판사업의 하나였던 이 <여유당 전서> 교열 간행은 민세와 위당이라는 올곧은 조선 선비의 치열한 노력도 컸지만 이것을 책으로 묶어 출판했던 신조선사 사장 권태휘의 열정도 크게 재조명 받아야 할 것이다. 안재홍의 고향 후배로 신간회, 조선일보, 조선학운동, 해방후 좌우합작 등에 깊은 인연을 맺으며 활동했던 사회주의 계열 민족운동가가 권태휘이다.

 

안재홍과 권태휘가 함께 발간에 힘쓴 다산 정약용 『여유당전서』

<여유당 전서> 간행 기사 (조선일보, 1938. 10.28)

1938년 10월 15일 다산 여유당 전서 전 76권이 완간됐다. 일제 강점기 출판 사상 최대 규모의 사업이다. 그 당시의 기쁨을 당시 신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정 다산 선생 전서가 완성되었다. 근세 조선의 최대 학자로서 실로 모든 학에 있어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이것을 정리 창시한 여유당 정다산 전집은 저자 자신이 그 시대에 이단시 되어 정치적으로 불우한 자리에 있었던 관계로 원고가 여기 저기 흩어져 정리하기가 곤란할 뿐아니라 굉장이 양이 많아 이 전집을 간행한다는 것은 여간 곤난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 사년전 1934년 9월 15일부터 신조선사 권태휘씨에 의해서 간행을 시작한 것이 올해 10월 15일에 전집 76권 전부가 완료되었다. 이 전집의 간행은 조선문화사에서 특기할 위업으로서 그 의의는 물론 장구한 시일과 3만 5천원의 경비를 들이며 여러 가지 곤란과 싸워 가면서 완성된 것이다. 전집의 교정은 학계의 권위 정인보, 안재홍 두 분이 맡아서 꾸준히 힘쓴 외에 윤치호, 공성학 씨 등은 물질적으로 원조함이 많다고 한다.(조선일보, 1938년 10월 28일자)

 

권태휘, 경성의전(현 서울의대) 재학중 3.1운동에 참여 수난 겪어

권태휘 혁청단 평택강연 기사(조선일보, 1925. 8.11)

민족운동가 권태휘는 1897년 11월 현재의 평택시 진위면 가곡리에서 태어났다. 진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경성봉명학교를 거쳐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 의대 전신)에 입학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때 평택 지역에서 운동에 참여했고 보안법 위반으로 3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부인 이경희도 징역 2년을 받고 평양 감옥에 수감됐다. 그는 1921년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으로 다시 징역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뤘다. 1923년 출옥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청강생으로 학생들의 정신 습관 개조와 공창제 폐지에 힘쓰는 혁청단 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 그는 안성, 이천, 영주, 경주, 제천, 충주 등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을 했다. 1925년 8월 3일에는 평택역전장로교회에서 혁청단의 과거와 현재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경성 혁청단 지방순회강연대 일행은 지난 3일 오후8시부터 평택역전장로회에서 진위청년회 동아일보지국 본사평택지국 후원으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김영주 군의 개회사가 끝난후 두 연사의 열열한 웅변은 수백 청중의 박수 소리 속에 경관의 주의를 들으면서 많은 감동을 주고 10시 30분에 무사히 폐회하였다. 강사와 주제는 아래와 같다. 혁청단의 과거와 현재 :권태휘, 시대정신과 교육 :옥순철(조선일보 1925년 8월 11일자)

 

다산 정약용 <여유당 전서> 발간에 기와집 35채 값인 3만 5천원 들어가

민세와 정인보, 권태휘가 발간에 힘쓴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전76권 (1938. 10.15)

권태휘는 1927년 2월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였던 신간회에 참여했다. 그는 주로 사회단체의 신간회 참여를 독려하고 지회의 조직과 발전에 힘썼다. 그해 10월 신간회 수원지회 설립에 참여하고 경성지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32년 경 권태휘는 조선일보에서 당시 사장이었던 고향 선배 안재홍과 함께 잠시 활동했다. 1934년 신조선사를 설립하고 다산 여유당 전서 간행을 적극 지원했다. 당시 서울에 좋은 기와집 1채 값이 1천원이던 시절이었다. 총 3만 5천원의 비용이 들어갔으니 35채 값을 다산 저서 발간에 힘쓴 것이다. 여기에는 윤치호, 유진태, 한용운, 김성수, 박한영 등도 뜻을 함께 했다. 그는 1939년 1월 여류실학자 이씨의 <빙허각전서>, 3월 <담헌서>, 1940년 <여암전서> 등도 간행했다.

1934년 7월 민세와 위당, 석전 박한영 스님 등은 2개월의 일정으로 충북 보은 속리산을 시작으로 논산 명재 고택과 관촉사, 정읍 황윤석 고택, 순창 신경준 고택 등을 함께 답사했다. 돌아와 1934년 9월 다산 서세 99주년 기념강연을 시작으로 다산 조명이 시작됐다. 1945년 해방이후 권태휘는 건준 참여를 끝으로 민세와는 다른 길을 갔다. 그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며 박헌영, 홍명희, 정노식, 이극로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는 1947년 2월 안재홍이 민정장관으로 활동했던 남조선과도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저항하는 활동을 벌였다. 아울러 대한민국 정부수립에도 참여하지 않고 1950년 6.25때 북한을 택했다.

 

평생 냉수마찰을 한 권태휘, 부인 이경희도 3.1운동 참여하고 근우회 활동

신간회운동에 참여했던 권태휘의 부인 이경희도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경성여자청년회, 근우회 경성지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빈곤한 아동을 위해 보화여학원, 반도여학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두 사람은 사회주의 이상을 함께 실천하려고 노력한 민족운동의 동지였다. 이경희의 회고에 의하면 두 부부는 서로 다투는 일이 없이 살았고 권태휘는 건강 관리를 위해 십년 넘게 냉수마찰을 했다고 한다. 이런 습관은 감옥에 있을 때도 계속되었다.

권태휘는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하는 독립운동가는 아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후 북한을 택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남북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서훈에 많은 제약이 있다. 자료를 통해 보면 권태휘는 3.1운동, 혁청단, 신간회, 조선학운동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항일운동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간행 80주년 기념 토크쇼 (2018. 10. 9 안재홍 고택)

평택학의 근간으로서 안재홍과 권태휘의 조선학운동 지속적으로 재조명해야


평택서는 10여년 전부터 평택학에 대한 논의가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논의가 편협한 향토사 인식이나, 중앙에 대한 열등감 극복 차원의 구별 짓기로서의 지방학을 넘어서 주체성과 독자성을 가진 지역학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평택학의 근간으로서 민세학에 대한 관심과 조명이 필요하다. 1934년 이후 조선학 운동을 주창하고 실천한 민족지성이 민세이며 그가 고군분투하며 <여유당전서>를 교열하고, <조선상고사감>, <조선통사>를 집필한 곳이 고향 평택 고덕이다. 이심전심으로 그 뜻에 공감하고 민세가 ‘조선학술사상 태양과 같은 존재’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다산 저작 발간에 힘썼던 후배 권태휘의 고향이 평택이다. 조선학, 민세학, 평택학으로 이어지는 그 긴밀한 연결 관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재조명 노력이 필요하다. 훗날 민족의 독립과 특히 조선학 진흥에 크게 힘쓴 평택의 민족운동가 권태휘의 활동이 널리 알려지고 제대로 자리매김 되기를 바란다.

 

황우갑 시민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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