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과 함께 한 평택의 독립운동가 원세훈 선생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위원 1주년 기념식에 함께한 안재홍(앞줄 왼쪽 두 번째)과 원세훈(두번째줄 오른쪽 여섯 번째). 앞줄 왼쪽 네 번째가 서재필, 일곱 번째가 김규식 (1947. 12. 13)

1989년 3월 1일 건국훈장 함께 받은 납북민족지도자 안재홍과 원세훈

[평택시민신문] 민주화 이후인 1989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6.25 전쟁때 납북되었던 민족지도자들에 대해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우리 고장 평택의 민족지도자 안재홍을 비롯해서 김규식, 조소앙, 원세훈, 김붕준, 박열 등이 이때 늦게나마 훈장을 받았다. 40여 년 만에 납북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이 빛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1991년 11월 17일 정부는 동작동 국립묘지 무후선열제단에 이들 납북 독립유공자들의 위패를 모셨다.

 

안재홍과 함께
독립과 통일에 
힘쓴 춘곡 원세훈

서울서 낙향해서 평택 안중에서 일제 말기를 보낸 춘곡 원세훈

평택이 고향은 아니지만 소중한 흔적을 남긴 납북민족지도자가 춘곡 원세훈이다. 춘곡은 일제 말기인 1940년 초 서울 답십리에서 평택으로 낙향 은거했다. 평택지역 독립운동 인물사에서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 걸쳐 전국적 영향력을 가졌던 두 사람을 꼽는다면 민세 안재홍과 춘곡 원세훈을 들 수 있다. 춘곡이 일제 말기에 평택 안중의 독립운동가 이조헌의 농장에 은거하며 훼절하지 않고 해방공간에서 치열하게 통일국가 수립에 헌신했던 것은 평택독립운동사의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재조명이 필요하다.

 

1936년 2월 단채 신채호 영결식에 함께 했던 안재홍과 원세훈

1936년 2월 24일 안재홍과 원세훈은 이역만리 중국 뤼순 감옥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순국한 단재 신채호의 유해를 맞이하러 남대문역에 나갔다. 이날 출영에는 권동진, 홍명희, 여운형, 신석우, 정인보 등도 함께 했다. 원세훈은 이날 충북 청원 단재의 고향까지 유해를 모시고 함께 갔다. 안재홍은 조선일보 재직 시절 단재가 쓴 ‘조선상고사’의 신문 연재를 도운 인연이 있으며 그의 사학을 계승해 신민족주의 사학의 토대를 마련하고 조선학 운동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원세훈도 단재와 중국에서 북경군사통일회의, 상해국민대표회의 등에 함께 하며 존경했던 대선배로 상해에서 북경 갈 여비가 없을 때 단재가 비상금을 털어 지원했을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치열한 민족정신을 지닌 시베리아의 항일 투사 원세훈

춘곡 원세훈 (1887∼1959)은 올곧은 민족정신을 지닌 시베리아의 투사이자 해방후 안재홍과 함께 좌우합작의 민족통일국가 수립에 앞장선 민족지도자였다. 원세훈은 1887년 함남 정평에서 태어나 19세에 서울로 상경 대동 법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10년과 1911년 두 차례 옥고를 겪은 후 동만주로 망명하여 모록의숙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으나 일제의 체포령으로 이를 피해 길림, 천진, 북경, 청도를 거쳐 1915년 러시아 우스리스크에 정착, 훗날 상해임정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와 교류했다. 여기서 그는 대동학교를 건립해 교민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31년 12월 그는 문창범, 이동휘 등과 함께 전로한족회에 참여하여 재무장관을 맡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혁 위해 창조파의 핵심인물로 활동

1919년 4월 원세훈은 대한국민회의 대표 자격으로 상해에서 안창호, 이규갑 등과 임시정부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1920년 원세훈은 두 차례 죽을 고비를 맞는다. 2월 일본 헌병의 저격을 받았고, 4월에는 일본 무장병력의 야간 기습을 받았다. 이때 안중근 의사 의거를 지원했던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 등 여러 독립지사가 순국했다.

1921년 원세훈은 상해 임정의 혁신을 위해 만든 국민대표회에 김규식, 여운형, 최동오 등과 함께 참여하여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자는 창조파로 활동했다. 또한 1925년 원세훈은 어업 관련한 소련과 일본의 비밀협정에 따라 극동 러시아지역에서 활동하는 한인민족주의자 강제추방정책으로 김규식과 함께 추방 당해 북경에 정착한다.

 

북경에서 평택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조헌과 가깝게 지내

그는 여기에서 북경대학 노문과에 들어갔다. 이때 평택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조헌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그러나 1927년 2월 그는 중국 관헌에 붙잡혀 일본 영사관에 넘겨져 국내로 압송돼 신의주 감옥에서 2년을 보낸다. 1930년 1월 만기 출소 후 서울로 올라와 답십리 근처에 살면서 독서와 집필, 국내 지식인과의 교류에 나선다. 시사주간지 『중앙시보』의 주간으로 일하면서, 유광열 등과 함께 조선문필가협회를 만들었고 유진태 등과 조선교육협회를 만들어 장학사업에도 힘썼다. 원세훈은 1940년 서울을 떠나 평택 이조헌의 농장으로 내려왔다.

좌우합작위원회 위원 확대 모임에 함께한 안재홍(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과 원세훈(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앞줄 왼쪽 다섯 번째가 김붕준, 여섯 번째가 김규식, 앞줄 오른쪽 첫 번째가 이극로. 두 번째 줄 왼쪽 다섯 번째가 강원룡 (1947. 6.18)

해방이후 좌우합작 추진위원 등으로 통일민족국가수립에 힘써

해방 이후에 원세훈은 통일민족국가수립에 힘썼다. 1945년 9월 한민당 총무에 선출되었다. 1946년 2월에 미군정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 7월에는 김규식, 안재홍, 김붕준, 최동오와 함께 좌우합작 우측 5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합작 7원칙 중 토지개혁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10월 한민당을 탈당했다. 1947년 10월 김규식, 홍명희와 함께 민족자주연맹 정치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김구, 김규식 등의 평양행을 만류했으나 함께 하고, 성과 없이 돌아와 1950년 5월 치러진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중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6.25가 나면서 납북됐다.

 

1930년대 이후 국내에서 긴밀하게 교류했던 안재홍과 원세훈

원세훈은 1930년 1월 국내에 정착한 이후 교육, 문필 활동 등을 하면서 안재홍과도 꾸준하게 교류했다. 1932년 3월 만주동포협의회 청산과 관련해서 원세훈은 안재홍, 정세권, 명제세 등과 함께 참여했다. 1933년 1월 잡지 ‘삼천리’에는 당시 국내에서 활동했던 사상가 총람에 안재홍과 원세훈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1936년 중국 군관학교 입교 사건과 관련해서 현동완은 일제 신문 증언에서 상해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김두봉이 군관학교에 입학할 희망자가 있으면 국내 청년을 보내 주기 바란다는 것과 군관학교에는 수명을 입학시키고 있는데 조선에 돌아가면 안재홍과 원세훈 등에게 그 말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는 내용이 있다. 일제 말기에도 안재홍은 고덕에, 원세훈은 안중에 은거하며 조국 독립을 위한 활동을 지속했기에 평택에서도 서로 긴밀하게 왕래하였을 것이다. 원세훈은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송진우, 민족변호사 이인과 친했다. 안재홍도 송진우와는 일본 와세다대 동창으로, 국내 언론을 이끌었고 이인과는 신간회 운동 등의 인연이 있었기에 이들을 연결고리로 두 사람은 꾸준하게 교류했을 것이다.

 

해방후 좌우합작 등 통일국가수립에 함께 힘쓴 안재홍과 원세훈

안재홍과 원세훈은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을 위해 의기투합을 했다. 국민당과 한민당으로 정당 활동은 다르게 출발했지만 좌우이념 대립을 넘어 통일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과 상식은 서로 통했다. 그래서 함께 두 사람은 민주의원으로, 남조선과도정부입법의원으로, 좌우합작 우측대표로, 민족자주연맹 회원,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차선책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한시적으로 인정하고, 2대 국회의원에도 함께 당선됐다. 그러나 6.25때 함께 납북되면서 그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안재홍과 원세훈의 치열한 실천 정신 평택에서 널리 알려야

민족운동가 춘곡 원세훈이 일제 말기 평택에서 수년간 지내며 해방의 그날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민세나 춘곡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열정이 있어 조선은 1945년 감격스럽게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원세훈의 호 춘곡(春谷)처럼 독립의 봄계곡까지는 어렵게 왔지만, 겨레의 비원인 통일의 봄계곡은 아직 오지 않았다. 원세훈은 일평생 희망의 봄계곡을 꿈꾸며 만주로, 시베리아로, 북경으로, 상해로, 서울로, 평택으로 거침없이 옮겨 다녔다. 이번 취재가 계기가 되어 그의 항일과 통일의 치열한 실천 정신이 평택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져 평택정신으로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황우갑 시민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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