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균
평택대 미국학 교수

[평택시민신문] 노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25년이 되면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1천만 명을 넘어선다. 평균 수명을 80세로 볼 때 65세 은퇴자에게 15년이란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이 시간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개인마다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답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노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은 욕구는 대동소이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미국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의 삶을 소개하기로 한다.

카터는 현재 미국 조지아 주 플레인즈(Plains)에 살고 있다. 전체 인구가 약 700명 정도인 작은 시골 마을이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다. 1946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던 해 같은 마을 출신인 로잘린(Eleanor Rosalynn Smith)과 결혼해 73년을 같이 살고 있다. 2019년 10월 1일 카터는 95회 생일을 맞이했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오래 살고 있는 대통령이다.

카터는 1981년 1월 플레인즈로 돌아왔다. 1980년 대선에서 카터는 공화당 후보 로널드 레이건에게 참패 한 후 후임 대통령의 취임식이 끝나자 바로 고향을 향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퇴임 후 카터는 새 집을 짓지 않았다. 1962년에 건축한 옛집으로 들어갔다. 거의 20년 된 낡은 집이었다. 현재 부동산 시가로 약 17만 달러 정도로 평가된다. 그는 지금(2019년)도 이 집에 살고 있다.

고향에 돌아온 카터에게는 부채가 많았다.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무기명 신탁에 맡겨 놓은 재산이 관리 소홀로 빚을 지게 된 탓이었다. 전직 대통령이 빚을 청산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고액의 강연료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임자였던 제럴드 포드 대통령도 퇴임 후 고액의 강연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카터는 그러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에모리 대학의 교수가 되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빚은 재산의 일부를 매각한 대금과 회고록 인세를 받아 갚았다.

귀향한 카터는 봉사활동에 매진했다. 빈곤층에게 집을 지어주는 헤비타트(Habitat for Humanity)운동에 참여했다. 재정적 후원자가 되는 대신 그는 건축 현장에 직접 동참했다. 톱과 망치를 들고 땀을 흘렸다. 부인 로잘린도 함께 참여했다. 국내 봉사를 넘어 해외 봉사에도 적극 나섰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다니며 빈곤과 질병 퇴치를 위한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정치적 후진국의 선거 모니터링도 주관했다. 1994년 북한의 핵 위기 때는 평양을 직접 방문하여 김일성과 담판했다. 실패할 경우 당할 수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2002년 노벨상위원회는 카터에게 평화상을 수여해 그의 노력을 격려했다.

70세 이후 노년에 접어들면서 카터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집을 출간하고 그림을 모아 화집도 출판했다. 취미로 가구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과 제작한 가구들을 모두 카터재단(Carter Center)에 기증했다. 카터재단은 그의 그림과 가구들을 경매하는 연중행사를 하고 있다. 카터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과 대지도 모두 재단에 기증한 상태이다. 사후 그는 현재 살고 있는 집터에 묻힐 예정이다.

지난 10월 6일 카터는 집에서 넘어져 열네 바늘이나 꿰매야 하는 상처가 났다. 그러나 다음날 카터는 집 짓는 헤비타트 일에 참여했다. 그의 왼쪽 눈 위 상처에 커다란 반창고가 붙여져 있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멋진 노년의 모습이었다. 이런 카터를 보기 위해 플레인즈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연간 7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에 따른 경제 효과도 약 400만 달러에 달한다. 부럽지만 닮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카터의 정신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2019년의 끝자락에서 노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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