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운동 90주년, 저항의 역사이야기

민족애를 실천하고 민족의식을 일깨운 광주학생항일운동
역사와 기억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양림동 문화마을, 펭귄마을 구도심 재생

[평택시민신문]

황우갑 시민전문기자

조선 청년의 민족혼을 드러낸 광주학생항일운동 90주년

광주는 한국 민족운동의 정신사적 상징도시이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과 1980년 5.18은 그 광주정신의 양대 산맥이다. 매년 11월 3일은 학생의 날이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해방 직후부터 기념하다가 후에 기념일로 지정됐다. 올해 11월 3일로 90주년이 된다.

안재홍이 1929년 9월 무등산과 광주를 다녀온 후 불과 한달 후에 광주학생운동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안재홍은 해방후 한성일보 언론 기고를 통해 광주학생운동을 부드러운 듯 실로 강맹(强猛)한 생존의욕을 송두리째 쏟아 부은 민족혼(民族魂)을 표현한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안재홍은 11월 3일 당시 조선학생들의 용맹함과 단결력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청년남녀들이 순진하고 지혜로운 작전이 계획되어 고등힉생은 제1선에 나서고 초급생들은 밀집종대속에 나열케하고 여학생은 구호와 물자보급을 담당하고 적과 넓은 거리에서 접촉하여 충돌이 있을 때 사납기로 이름높은 일제의 건아들이란 자도 우리의 결사적 공격에는 견디어볼 나위도 없이 광주역 구내를 향해 쫓겨 무너지는 결말을 지었다. (한성일보 1949년 11월 3일자)
 
광주 서구 학생독립로에 위치한 광주학생운동기념관

조선 학생들에 대한 일제의 차별이 항일운동으로 승화

1929년 당시 광주의 인구는 2만 4천명 정도였다. 이 가운데 약 1천호에 4천 명 가량이 일본인이었다. 안재홍도 광주 탑산공원을 돌아보며 일본인들이 설치는 것을 안타까워한 바 있지만 일본인들은 광주 도심의 노른자위 땅을 차지하고 정치와 경제적 특혜를 누렸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일삼는 식민지의 삶은 학생들의 생활 속에도 그대로 고통으로 나타났다.

나주역에서 시작돼 11월 3일 광주학생들의 참여로 커져

기념관에서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113개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광주학생운동기념탑이 서 있다.

광주학생운동의 시작은 나주역이다. 지금도 그 곳에는 당시 학생들의 뜨거운 저항을 알리는 기념시설이 건립되어 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 도착한 광주발 통학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일본 경찰들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들고, 광주고보 학생들은 차별에 대해 집단 항의하였다.

1929년 11월 3일(음력 10월3일)은 일본에게는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었지만, 조선인들에게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이었다. 한국인의 시조를 기념하는 날에 일본 천황의 생일을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불러서 축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조선인 학생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하굣길에 일본인 학생들과의 충돌사건을 불공정하게 보도한 광주일보에 몰려 들어가서 항의했다. 이 와중에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조선인 학생이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에게 테러당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폭력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광주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용감히 일제를 물리치자는 내용의 행진가를 부르는 가두시위를 하였다. 일제는 항일시위에 가담한 70여 명의 조선인 학생 중 60여 명을 구속했다.

광주 서구 학생독립로에 위치한 광주학생운동기념관

운동의 전국 각지 확산에 신간회가 크게 기여, 민세도 수난 당해

이후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이후 12월 13일까지 서울지역에서만 1만 2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 동맹휴학에 참여하였고, 그중 1400여 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신간회는 이 광주학생 시위운동을 전국적 항일독립운동으로 확산시키는데 조직적으로 노력했다. 12월 10일 권동진, 허헌, 동아일보사장 송진우,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 조병옥, 홍명희, 한용운, 주요한 등이 대책회의를 갖고, 12월 13일 광주학생사건 진상을 발표한 후 곧바로 군중을 선동하여 시위운동을 하며 지방지회에도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지시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날 아침 신간회 주요 간부진이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안재홍도 송진우와 함께 불구속 송치돼 4차 옥고를 치뤘다.

광주사변이 직접 도화선이 되어 각처에서 학생층을 중심으로 한 일대 시위운동이 경성, 평양 등 십여 개소에 달하였고 그 참여 학생 총수가 서울의 일만 이천명을 필두로 약 이만 여명의 다수를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지난 13일 아침에 경기도 경찰부는 긴장하며 다수 형사대가 자동차를 몰아 신간회중앙위원장 허헌씨를 검거하는 한편 엄밀한 가택수색을 하여 여러 가지 서류를 압수하여 돌아간 것을 비롯하여 벌써 칠십 여명이 체포되었는데... (조선일보 1929년 12월 28일)
 
양림동 역사문화마을에 있는 오웬기념각

학생들의 숭고한 뜻을 기억하는 기념관과 학생회관

광주광역시 서구 신도시에는 광주학생운동기념관과 기념탑이 서있어 90년 전 그날 청년학생들의 뜨거웠던 정신을 후대에 계승하고 있다. 2층으로 조성된 기념관은 1층에 1929년 당시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애국지사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있다. 2층에는 광주학생운동의 진행과정과 관련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념관 바로 옆에는 광주항일운동 학생회관이 별도로 서 있다. 기념관만 있어서 관련 자료를 보고 나면 재방문이 쉽지 않은데 입구 학생회관에서는 도서관, 강연장, 문화시설 등이 함께 있어 청소년들이 이 공간을 이용하면서 광주학생운동의 정신을 기억할 수 있게 만들었다. 광주학생운동기념관은 규모에 비해 여러 가지 아쉬운 점이 많다. 전시와 추모공간 중심으로 구성하다보니 방문객들을 위한 교육공간, 재방문을 유도할 수 있는 기획전시실의 부재, 휴게공간이 없는 문제점이 있다. 기념관이 주제에 집착하다보니 상설전시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주학생운동기념관에서 다른 독립운동 관련 다양한 전시를 할 수 있는 기획 공간을 보완해 나갈 필요가 있다.

광주 남구 구도심 재생으로 인기를 끄는 펭귄마을

광주 양림동 역사문화마을과 펭귄마을 구도심 문화재생 현장

돌아오는 길에 광주 남구 양림동과 최근 방문객이 급증하고 있는 그 옆 펭귄마을을 찾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항일운동의 기억이 광주의 중요 장소자산이자 관광자원이라면 광주 구도심을 대표하는 양림동지역 사직공원 아래 근대 건축물 수피아여고, 오웬기념각 등과 퇴락한 마을에 기억의 복원을 통해 펭귀마을이라는 새로운 가치 부여를 통해 구도심 활성화에 힘쓰는 사례도 방문객에게 기억과 흔적을 되새기고 찾고 복원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사례이기도 하다. 90년 전 안재홍이 찾아왔던 광주와 무등산, 그 길을 다시 걸으며 내내 과거와 현재, 미래가 어떻게 연결되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생각해봤다. 민세와 같은 독립운동가, 광주학생운동 순국선열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생각을 다시금 소중하게 느끼고 돌아온 시간이었다. <끝>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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