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그 길을 가며 광주항일정신을 생각하다
민세 무등산행은 민족정기를 일깨우기 위한 성찰의 시간
차별없는 무등 정신을 사랑한 김덕령, 허백련, 오지호, 김현승, 노무현
[평택시민신문]
남도 조선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끼고 배우다
안재홍은 광주답사 이틀째인 1929년 9월 27일 하루 일정으로 무등산에 오른다. 산행은 증심사에서 시작해서 장골이재를 지나 지금은 군기지 주둔으로 통제하고 있는 정상 천왕봉에 올랐다. 민세는 내려오는 길에 광석대와 규봉암을 지나 다시 처음 출발했던 증심사로 돌아와 저녁차로 서울로 돌아왔다. 민세의 무등산 등반은 조선 자연의 아름다움을 현장에서 느끼고 민족정기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한 성찰의 시간이었다.
밤숲을 지나 남쪽으로 새인봉의 우뚝 솟은 석대(石臺)를 바라보며 밑으로 소나무숲이 앙상 다부록한 작은 봉 너머 지붕도 보임직한 약사암 일대의 곱고도 편안한 경치를 내려다 보고 군데군데 있는 오두막 초가 마당으로 지나 돌 틈으로 새어나는 물에 마른 목을 축이고 김덕령이 어려서 세 보았다는 두어 다랑이 적은 논을 쳐다보며 중머리고개 민틋한 봉에가서 벌써 눈 아래에 내려 깔린 화순 남평 일대의 경치를 한눈에 바라보며 잔디를 자리 삼아 팔베고 누웠다.2018년 독특한 주상절리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
무등산은 통일신라때 무진악(武珍岳) 또는 무악(武岳)으로 표기하다가 고려 때 서석산(瑞石山)이란 별칭과 함께 무등산이라 불렸다. 이 밖에도 무당산·무덤산·무정산 등 여러 산명을 갖고 있지만 광주사람들은 무등산이라는 이름을 더 좋아한다. 안재홍은 기행문에서 서석산이라고 표제를 달았다. 이 무등산의 상서로운 돌 즉 서석(瑞石)의 명칭은 무등산이 자랑하는 남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수직바위인 주상절리(柱狀節理) 때문이다. 2005년 천연기념물 465호 지정에 이어 2018년 이 곳 무등산권은 국내 6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지정됐다.
서석의 꼭대기에 올랐다. 거인의 칼로 단번에 베여 내친 듯이 높고 낮은 그 많은 돌의 머리들이 거의 예외없이 판판하다. 훈훈하여 바윗돌 만져보니 따뜻한 볕에 미지근한 돌이 살에 닿아 다정하다. 오늘 비개인 후의 가을날이 맑고도 고요하여 4천척 높은 봉에 따뜻한 해가 등을 쪼이고 가고 있는 바람에 나뭇잎도 움직이지 않아 등산객에게 알맞은 기후였다.신선미와 노년의 경륜, 선비정신과 여성미가 어우러진 무등산의 자태
안재홍은 무등산에 오르며 주상절리(柱狀節理)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이미지에 감탄했다. 민세는 이것을 10대 여성의 신선한 아름다움을, 경륜이 가득한 노년의 미를, 꼿꼿한 지조를 굳게 지키는 선비의 아름다움과 원숙한 여성의 미라고 표현했다. 특히 무등산은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의병을 일으켜 임진왜란기 왜군에 맞서 싸운 충장공 김덕령의 정기가 서려있다. 민세는 무등산의 국사미를 강조했다. 안재홍 자신이 훗날 후배 사학자 천관우에 의해 고절의 국사라는 평가를 받았으니 이 또한 흥미로운 일이다.
아아 장관이다. 산악미를 보는 데 연기별이 있으니 뾰죽뾰죽 치솟은 봉에 암석이 곱게 빛나고 계곡이 흘러내려 보드라운 곡선미가 황홀하게 사람의 정을 끄는 것은 묘령의 처녀미요, 우릉트룽하게 높고 험한 봉우리가 가득 모여 험상스러운 암층이 천길 높은 낭떨어지도 이루며 쑥 들어간 계곡속에 독품은 용이 춤추는 듯 하는 것은 쇠약해지는 노옹미일 것이다. 무등산 곳곳에 반석이 있고, 등선이에 5∼7리에 빽빽하게 늘어선 돌을 내뽑아서 수직으로 자른 모양으로 된 빛나는 암석미가 웅혼함에 다시 준엄한 기골로써 하니, 이는 장년기의 돈후하고 장중한 국사미가 아니면 그 중년기의 성대하고 깨끗한 숙녀미인 것이다.허백련과 오지호, 김현승과 노무현의 무등산과 광주 사랑
수박과 차는 예로부터 무등산의 특산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등산 차밭은 한국화의 거목이었던 의재 허백련이 맡아 일구어 삼애다원이라 이름 짓고 ‘춘설’이라는 녹차와 홍차를 생산하였다. 의재 허백련은 민세와 같이 1891년 생이다. 훗날 민세에게 자신의 그림도 선물한 인연이 있다. 증심사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무등산을 사랑하며 한국화의 정신을 지키고자 힘쓴 허백련의 예술 세계를 엿볼수 있는 의재 미술관도 자리하고 있다. 광주는 ‘가을의 기도’로 널리 알려진 절대고독의 시인 김현승이 작품활동을 했던 곳이다. 또한 서양화가로 인상주의적인 화풍과 이론을 통하여 서양화의 발전에 힘쓴 호남화단의 거목 오지호 화백이 활동했던 곳이다. 양림동 사직공원 올라가는 길에는 김현승 시비가, 무등산 입구에는 오지호 화백의 미술 업적을 기리는 추모비가 서있다. 무등산에는 노무현길 기념비도 있다. 故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광주 5.18 기념식 참석후 무등산(無等山)에 올랐다.
증심사 가는 길목에 민세기념비도 세워야
무등산과 관련한 이런 역사 인물은 분명 장소자산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무등산 지질공원탐방센터 이정현 해설사는 필자가 민세의 무등산답사기를 소개하자 큰 관심을 보이며 사진으로 원고를 일일이 찍었다. 기회가 되면 증심사 가는길에 민세기념비도 세워 무등산에 대한 그의 애정을 널리 소개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
무등산 전설로 내려오는 임진왜란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
광주의 상징 거리는 충장로다. 충장은 임진왜란때 호남 의병을 일으킨 충장공 김덕령의 시호다. 광주에서 태어나 무등산의 정기를 받고 자란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과 함께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전라도로 들어오는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후에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곽재우와 함께 크게 활약했다. 그러나 후에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곽재우와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민세도 무등산에 오르며 김덕령 관련 전설을 자주 접한다. 또한 그는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하는 것은 당쟁이나 파쟁이나 중상모략이 아닌 공동체를 위해 자기 희생과 헌신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서석의 머리마다 깨끔 뛰어다니면서 돌 위에 돌을 포개 놓은 것이 충장공(忠壯公)김덕령의 옛 자취라고 안내인은 모든 것을 들어 김충장의 전설로써 설명한다. 원효암 뒷봉에 주검등이 있고 지싱의 동남으로 충효리가 있어 김충장의 출생, 성장, 사후의 수 많은 일화와 전설을 남긴 것은 무등산을 아는 자의 누구나 모두 추억거리가 되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침입을 하느니 안 하느니, 이순신이 옳으니 그르니, 김덕령이 충신이니 역적이니, 죄인을 잡아 가둔다 임금이 친히 문초한다가 모두 허망과 모함, 중상과 배제의 사적인 불순한 당쟁과 파쟁에서 나왔다는 것은 시비를 말하는 것이 입내 나는 것을 보이는 일이다.민세가 민족정기의 가능성을 발견한 거석문화의 성지 무등산
민세는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가 식민사관의 하나로 조선과 일본은 같은 조상이라는 일선동조론, 단군부정론에 맞서 고대사 연구에 힘쓴다. 그리고 단군 관련 흔적을 찾기 위해 백두산, 구월산, 마니산 등지를 답사했다. 민세의 무둥산행에 이런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태양숭배로부터 생식기 숭배, 생식기 숭배에서 선돌숭배, 그리하여 부동상주하는 여래신으로서의 숭배로 전화 변천한 신앙생활의 지나온 자취를 여기서 많이 볼 것이요 무등산이 거석문화 연구상으로 보아 성지, 신역과 같이 추증되는 이유를 짐작할 것이다.그는 고대사 탐구를 통해 민족의 올바른 정신을 찾으려고 힘썼다. 특히 민족정기는 민세가 유난히 강조했던 문구다. 민족정신을 잃지 않으면 우리에게 언제가 광복의 새빛을 맞이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음호에 계속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