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세 안재홍이 만난 광주의 지도자들

독립운동가 최원순, 호남 최초 여의사 현덕신 만나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 할아버지 현준호 호남은행장, 
홍라희 전 삼성리움 관장의 외할아버지 김신석 호남은행 전무와도 교류 

[평택시민신문] 

황우갑 시민전문기자

무등산 증심사에서 민족언론 발전을 위한 지혜를 모으다

1926년 4월 지리산 쌍계사에서 열린 전조선기자대회에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안재홍은 부의장에 선출된다. 민세는 그 시기에도 서울에서 출발 대구, 부산, 마산, 통영을 거쳐 하동 쌍계사에서 기자대회에 참석하고 다시 구례, 임실을 거쳐 전주까지 20여 일의 여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여기 소개된 글의 일부가 해방후 ‘춘풍천리’, ‘목련화 그늘에서’ 등으로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1929년 9월 광주 무등산 기행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조선일보 전남 23개군의 지국장들과 함께 신문발전을 위한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고 학습하는 자리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일보는 4면에 5만부 정도를 발행했다. 80%가 넘는 문맹률에 신문은 만성 적자로 어려움이 컸다. 그래서 혁신 조선일보의 경우 사주 신석우가 10만원, 안재홍이 1만원 정도의 사재를 털어 민족 언론 발전에 힘썼다. 당시 아주 비싼 기와집 1채가 천원 정도였으니 민세의 경우 현재 화폐 가치로 따져도 30억 넘는 자본을 조선일보에 투자했던 셈이다. 이 날 지국 경영자 모임은 광주 무등산의 대표 사찰인 증심사에서 열렸다.

1929년 9월 광주답사때 안재홍이 찾았던 무등산 증심사 오백전과 삼층석탑
서재에 들어가 잠깐 쉬고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방문객과 이야기하고 광주에 사는 친구들의 근황도 들은 후에 시가를 둘러볼 새도 없이 오늘의 집회소인 무등산 증심사를 향해 다시 자동차 위의 사람이 되었다. 오늘의 회합은 전남 23개군의 지국 경영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강독하고 신문발전을 위하여 무엇이고 좋은 방안을 강구하자 함이다. 일찍이 지리산 쌍계사(雙磎寺)에서 영호양남기자대회(嶺湖兩南記者大會)로 모일 때에 아름다운 곳에서 여러일 동안 멋진 경치를 즐겼는데 오늘의 증심사 모임은 일가 형제의 단결을 위한 모임이라고도 하겠다. 일행은 우리 두사람까지 합해 이십사오명에 달한다.
 
보물 제131호 광주 증심사 비로자나불 좌상

무등산의 대표 사찰 증심사와 신라 하대 문화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이날 안재홍이 찾은 증심사는 무등산 서쪽 기슭에 있는 광주의 대표적 불교도장이다. 증심사는 9세기 중엽 철감 선사가 초창한 고찰로 고려 선종 11년(1094년) 혜조국사가 중창하였고,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뒤 광해군 원년(1609년) 다시 보수했다. 그러나 6․25 전쟁때 오백전과 사성전을 제외한 대웅전, 명부전, 극락전, 회승당, 취백루 등 조선 중기의 건축물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이들 전각에 봉안되어 있던 불상과 정화를 비롯하여 범종, 탑 등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막대한 피해를 당하였다. 현재 이 절에는 보물 131호인 철조비로자나불이 비로전에 모셔져있다. 이 불상은 장흥 보림사, 철원 도피안사 불상과 함께 신라 하대 대표적인 철불이다. 대웅전 뒤편 오백전은 민세가 찾았던 시절에도 있었던 건물이었고 앞에 삼층석탑도 제 위치에 있어 반가웠다.

안재홍, 광주의 지도자들과 교류하다

동경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최원순

안재홍은 광주와 무등산 답사때 여러 지인들과 만났다. 그 대표적 인물은 최원순, 현덕신, 현준호, 김신석이다. 민세의 답사에 숙소를 제공하고 일정을 함께한 최원순은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인물로 귀국후 동아일보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며 언론계에서 민세와 교분을 쌓았다. 무등산행에 소화제까지 챙겨준 현덕신은 최원순의 부인으로 호남 최초의 여의사였다. 답사때 저녁을 함께 나눈 현준호는 민세와는 일본 동경 유학시절 함께했던 친구사이였다. 안재홍은 와세다대, 현준호는 조만식과 함께 메이지대를 다녔다. 현준호는 호남 최대의 갑부로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은 현준호의 손녀이다. 김신석은 현준호와 함께 호남은행을 경영한 기업인으로 그의 딸이 홍진기 전 법무장관과 결혼해서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를 낳았다. 민세는 후에 한국 경제 양대산맥인 삼성가와 현대가의 토대를 놓은 경제계 인사를 만났다.

날이 이미 저물어 신간회관도 문이 잠겼고 청년연맹과 근우회지회와 기타 각 단체 사무소도 모두 끝난 때이라 방문을 그만두고... 약속한대로 무송 현형(현준호)의 초대에 응하여 다시 모 음식점에서 저녁을 함께하게 되었다. 호남은행 김신석씨의 한라산 등반 이야기도 듣고... 무송이 자랑하시는 호남의 명창 소리도 들었다. 여기서는 ‘동경행진곡’, ‘국경경비가’이니 하는 얄궂은 노래란 일체 없고 조선의 향토정조를 당는 신구의 가곡을 듣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동경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최원순과 부인으로 호남 최초 여의사 현덕신

호남 최초의 여의사 현덕신

석초 최원순은 광주 출신으로 안재홍의 와세다대학 정경과 후배였다. 재학중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수난을 당했다. 졸업하고 귀국 192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정치부장, 광주지국장, 편집국장대리를 역임했다. 1927년에는 안재홍이 주도한 신간회 결성에도 참여했다. 민세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고문 휴유증 등으로 몸이 좋지않아 고향으로 내려와 요양중이었다. 그는 의사였던 부인 현덕신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1936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석초의 부인 현덕신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이화학당 중등과를 거쳐 1921년 동경여자의전을 졸업했다. 유학중 김마리아, 나혜석과 함께 동경여자유학생회를 조직 항일의식 고취에 힘썼다. 1919년 2·8독립선언에 와세다대학 학생이던 남편 최원순과 함께 참여하였다. 귀국후 최원순과 결혼했고, 1927년 신간회 자매단체인 근우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8년 5월 초순 남편의 요양을 위해 광주로 내려온다. 1928년 광주 최초의 산부인과인 ‘현덕신 산부인과병원’을 개업하였다.

호남 최대의 갑부이자 호남은행 설립자 현준호와 호남은행 전무 김신석

호남은행 전무 김신석

호남은행장 현준호

일제 강점기 호남 최대의 갑부였던 무송 현준호는 휘문의숙에서 공부하고, 일본 메이지대학 법대에서 유학했다. 이 시기에 안재홍, 조만식, 김성수, 송진우, 김병로, 최두선 등과 교류했다. 귀국후 현준호는 1920년 민족은행인 호남은행을 설립했으며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참여했다.

현준호는 호남은행의 회계 담당으로 조선은행의 김신석을 스카우트했다. 그는 목포지점장과 전무를 지냈다. 경남 산청 출신의 김신석은 암산이 주산보다 빠르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똑똑했다. 부산상고에서 공부하고 조선은행에 들어가더니 얼마 안가 금융계에서 회계 천재로 명성을 떨쳤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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