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민족 양심 지킨’ 민족지도자 민세 

“아시아 제 민족 각자의 사명 다해야 할  국제적 조건 똑바로 인식해야” 강조

[평택시민신문] 일본의 경제보복과 다시 생각해보는 한일 관계

황우갑 시민전문기자

광복절 74주년을 앞두고 있다. 최근 일본이 경제 반도체·스마트폰·TV 제조에 쓰이는 첨단 필수 소재의 대한(對韓) 수출 규제에 이어 한국을 안보상 우호 국가인 백색국가에서 제외하겠다고 밝혀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일본정부가 일제 36년간 식민지배와 그 만행에 대한 진심어린 사죄조차 하지 않았던 현실에 이은 적반하장겪인 이번 경제 보복에 국민적 분노가 증폭되고 있다. 다시금 한일관계의 근본을 생각하게 한다.

광복 당시 국내 민족지도자 안재홍의 한일관계 인식을 생각한다

광복절을 맞아 74년전 감격의 해방을 맞이한 그 시기 조선의 민족지도자들은 광복을 어떻게 바라보았고 특히 한일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우리고장 평택 출신의 민족지도자 민족지도자 안재홍은 8.15 당시 국내에 남아있던 몇 안되는 민족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일제가 보낸 자객의 암살 위협을 피해 서울 시내 각지를 돌며 은거하던 안재홍은 해방 이후 정국을 구상했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당시 8살 나이의 이문원 중앙대 명예교수는 아버지 평주 이승복과 함께 서울 모처 임여관에 있었던 안재홍에 대한 구체적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안재홍씨와 선친 이승복씨는 일제 말기에 도피중이었어요. 서울 시내를 전전하며 다녔지요. 제 기억에는 제가 8살 무렵인 1945년 3월인가 덕수궁 부근에 있던 임여관에 두 분이 함께 묵으실 때 찾아간 적이 있어요. 거기 가면 과자 등 간식이 있어 가끔 몰래 이곳을 들렸던 기억이 나요. 선친은 이 때 다시 투옥되었지요.

안재홍 해방 군중연설 (1945. 8. 16.서울 휘문중학교)

1945년 8월 16일 오전 10시 민족지도자 안재홍 첫 해방연설을 하다

민세는 1945년 8월 16일 오전 10시 경성방송국(현 KBS 전신)을 통해 국내 민족지도자를 대표해서 해방 연설을 했다. 당시 상황을 한국 1호 방송 기자 故 문제안 씨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되었지만 국민들은 그 사실을 대부분 잘 몰랐어요. 방송을 통해 나오는 해방 만세 영상은 대부분 8월 16일 이후의 일입니다. 그래서 16일 아침에 지금의 현대 계동 사옥 앞에서 민족지도자들이 함께 첫 만세를 부르고 오전 10시에 제가 근무하는 경성방송국을 통해서 안재홍 씨가 첫 해방 연설을 하셨지요. 제가 안재홍 씨 방송 당시 역사적인 그 자리에 있었어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지요. 당시 국내에 존경받는 민족지도자로 여운형과 안재홍씨 등 몇 분 없었어요. 그래서 대표로 해방된 감격과 함께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을 말씀하셨지요. 이날 연설방송을 마치고 오후에 휘문중학에 가서 여운 형씨와 함께 해방 기념 군중연설도 하셨어요.

비상한 시기에 최악의 과오를 범하지 않는 냉정한 현실 인식 강조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해내 해외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이 날 연설은 국내에 남아있던 비타협 민족지도자를 대표한 연설이었다. 민세는 일본의 급작스러운 항복으로 맞이한 이 상황을 민족의 성패가 달린 비상한 시기로 인식하고 최악의 과오를 범하지 않는 냉정한 현실 인식을 강조했다.

여러분! 우리 조선민족은 지금 새로 중대한 위기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이러한 민족성패가 달린 비상한 시기를 맞이하여 만일 성실과감하고도 총명주밀한 지도로써 인민을 잘 파악하고 통제함이 없이는 최대의 광명에서 도리어 최악의 과오를 범하여 대중에게 막대한 해악을 끼칠 수가 있기에 우리는 지금 가장 정신을 가다듬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또 뜀박질하여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국내에 남아있던 수십만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 보장 호소

이 연설의 중요한 내용가운데 하나가 국내에 남아있던 수십만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고 한일관계의 미래를 생각해 감정적 대응을 하지 말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연설은 패전으로 국내에 남아 불안에 떨고 있던 일본인들에게는 무엇보다 고마운 연설이었다.

조선·일본 양민족이 자주 호양의 태도를 견지하며 조금도 마찰을 없이 하는, 곧 일본인 주민의 생명 재산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과거 사십년 간 총독정치는 벌써 과거의 일이고 조선과 일본 두 민족은 정치형태가 어떻게 변천되든지 자유호양(自由互讓)으로 아시아 제민족으로서의 떠 매고 있는 각자의 사명을 다하여야할 국제적 제 조건 하에 놓여있는 것을 똑바로 인식하여야합니다. 우리들은 수난의 도정에서 한걸음씩 가시덤불을 헤쳐 나아가는 데에 서로가 공명동감하여야 합니다(매일신보, 1945년 8월 17일자).

생명의 은인이었던 한국지도자에게 사죄와 감사의 뜻을 전한 일본 지식인

2006년 5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시정을 위해 힘쓰는 일본 시코쿠 에히메 현 시민단체 사람들이 평택 안재홍 고택을 방문했다. 이때 함께 와서 안재홍 생가를 방문한 80 넘은 한 일본 노인은 자신이 1945년 8월 15일 당시 한국에 남아있었고 매우 불안에 떨었는데 라디오 방송에서 한국지도자 안재홍이 일본인의 무사 귀환을 호소한 연설을 들은 적이 있다고 증언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제가 1945년 8월 16일 당시 채 스물도 못 된 시절인데 그때 우리 가족이 한국에 있었어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몹시 불안했어요. 그날 한국인 지도자가 방송을 통해서 일본인들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절대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 연설을 들은 기억이 나요. 저도 보고 산 세월이 있으니 일본이 한국에 준 피해를 잘 알고 있어 역사교과서왜곡 반대운동에 에히메 현에서 참여하고 있어 그 인연으로 평택에 와서 그 연설을 한 분의 집을 방문하니 너무 감개무량합니다. 그 고마운 사람이 바로 이분이었구나 생각하며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패전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에게는 안재홍 선생이 생명의 은인이었지요.

일제의 유혹을 물리치고 조선 민족의 양심을 지킨 민세 안재홍

민세는 오전 해방 연설을 마치고 오후에는 군중들 앞에서 기념 연설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중학생이었던 언론인 송건호는 8월 16일 오후 휘문중학교에서 해방연설을 할 당시 안재홍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해방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오후 늦게 종로 계동 휘문중학 교정에 운집한 시민들 앞에서 말할 수 없이 초라한 어떻게 보면 걸인 같은 모습의 한 50대 중반의 신사가 해방된 민족의 앞날에 관하여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얼굴이 영양실조와 고생으로 윤기 없이 까맣게 탄 이 노신사야말로 민중이 존경해마지 않는 민족지도자 안재홍이었다. 삼엄한 일제의 총검 치하에서 , 그들의 온갖 협박과 유혹을 물리치고 끝내 조선민족의 양심을 지킨 민족지도자 민세 안재홍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한일 관계 최악의 과오는 서로 피하고 대화 지속해야

돌아보면 해방 당시 민세 안재홍의 해방연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선 비상한 시기를 맞아 냉정을 잃지 말고 최악의 과오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이후 역사는 극심한 좌우대립속에서 납북분단과 6.25라는 최악의 과오를 범하게된다. 이는 역설적으로 일본의 경제 부흥을 도왔다. 일본인들의 무사귀환과 생명 안전 보장을 호소한 안재홍과 같은 품격있는 한국지도자들의 생각과 달리 일본은 식민지배 자체에 대한 사죄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럴수록 민세가 강조한 아시아 제민족으로서 각자의 사명을 생각하고 한일관계의 미래를 고민하면서 냉정을 유지하고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양국의 공동번영, 이를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의 번영을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안재홍은 일제 강점기 국내에 남아 끝까지 저항하다가 9차례, 7년 3개월의 경이적인 수난을 당한다. 그는 그 누구보다 일제로부터 고통을 많이 당한 민족지도자였다. 그러나 그의 해방연설에는 감정적 보복보다는 한일관계의 미래를 생각하는 깊은 통찰과 냉정한 현실인식이 담겨있다. 민세는 일제강점기 충무공 이순신 선양에 가장 앞장 섰던 사람이다. 민세는 충무공의 경거망동하지 않는 냉정함을 높게 평가했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는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 대목이다. 또한 한일관계에서도 최악의 과오는 서로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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