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3.1운동의 정치적 근거가 되었던 민족자결주의는

왜 국제질서의 새로운 원칙으로 작동하지 못하였던 것인가?

김남균 평택대 미국학과 교수

[평택시민신문] 100년 전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3.1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민족자결의 꿈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1945년 8월 15일에야 독립할 수 있었다. 3.1운동의 정치적 근거가 되었던 민족자결주의는 왜 국제질서의 새로운 원칙으로 작동하지 못하였던 것인가? 여러 가지 이유 중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일부 이해할 수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보내면서 윌슨 대통령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살펴보기로 한다.

1918년 초 미국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의회에서 행한 국정연설에서 윌슨은 각 민족은 스스로 정치적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윌슨의 연설이 나온 시기는 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한 몇 달 후였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유럽에 대해 고립주의 외교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윌슨은 1차 세계대전에 개입했다. 미국의 참전배경에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멕시코에게 미국과 전쟁을 부추킨 독일 외무장관의 전보문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1917년 1차 대전에 개입하면서 윌슨 대통령은 미국의 참전 목적은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제국주의적 욕심이 없음을 적극 내세웠다. 1차 대전 중 5만 명 이상의 미군이 목숨을 잃었다. 외교사적 분수령에 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차 대전을 지켜보면서 윌슨은 또 다른 세계대전을 방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이 1918년 국정연설에서 민족자결주의로 표현된 것이다. 같은 연설에서 윌슨은 전후 국제질서를 혁신시킬 새로운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것이 14개조 외교정책이었다. 14개 조항 중 윌슨이 가장 중시한 것이 국제기구의 창설이었다. 그리고 1919년 6월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은 국제연맹의 창설을 관철시켰다.

파리에서 귀국하던 윌슨은 가슴이 벅찼다. 자신의 주도로 국제연맹을 창설하게 된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전쟁의 원인인 국가 간 갈등을 국제연맹에서 논의를 통하여 해결한다면 전쟁은 영원히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부친이 목사였고 자신도 독실한 장로교 신자였던 윌슨은 평화의 선지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서둘러 상원에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을 요청했다. 그런데 상원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베르사유조약 자체에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의원이 많았다. 베르사유조약의 일부로 채택된 국제연맹 규약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었다. 국제연맹에서 국제문제를 논의하여 결정한다면 미국의 국익에 반대되는 결정도 나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경우 거부권이 인정되지 않아 미국의 주권이 침해된다고 주장했다. 주권 침해의 가능성을 이유로 미국 상원은 베르사유조약의 비준을 거부할 태세였다. 상원의 부정적인 움직임을 감지한 윌슨은 여당인 민주당 의원들에게 조약의 비준을 독촉했다. 그러나 상원 외교위원장이던 공화당의 헨리 로지(Henry C. Lodge) 의원은 베르사유조약의 비준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

조약의 비준이 난관에 부딪치자, 윌슨은 순회강연에 나섰다. 열차를 전세 내어 전국을 순회하며 국제연맹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런데 1919년 9월 윌슨이 콜로라도 주 프에블로에 도착하였을 때 과로로 쓰러졌다. 급히 백악관으로 돌아갔으나, 며칠 후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수개월 후 어느 정도 회복은 하였으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1921년 3월 퇴임 때까지 윌슨은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한편 상원은 베르사유조약을 무조건 거부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강대국이 참여한 국제조약이었다. 조약의 비준을 지지하는 국내 여론도 많았다. 상원 외교위원장 로지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국제연맹규약의 일부를 수정하는 타협안이었다. 윌슨이 동의하면 민주당 의원들도 로지의 타협안에 가세할 태세였다. 그러나 윌슨은 타협안을 거부했다. 그는 민주당 의원들에게 타협안에 대한 반대투표를 지시했다. 타협안은 상원 통과에 실패했다. 윌슨이 주장하던 베르사유조약의 원안도 결국 비준에 실패했다.

베르사유조약의 비준 실패는 윌슨 외교의 파산이었다. 미국은 국제연맹에 가입할 수 없었다. 반면 승전국의 하나였던 일본은 국제연맹의 회원국이 되었다. 우리의 3.1운동에서 주장하던 독립의 꿈은 멀어지고 말았다.

만약 미국 상원이 베르사유조약을 비준하고, 미국이 국제연맹을 주도하였다면 우리의 독립은 어떻게 되었을까?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윌슨이 타협안에 동의하였으면 베르사유조약의 상원 비준이 가능하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윌슨은 베르사유조약의 타협안을 거부하고 오직 원안의 비준만 주장했다. 윌슨은 자신이 옳다고 믿었다. 타협보다는 패배를 택했다. 독선의 정치였다. 본질적으로 정치의 기본은 타협이다. 1차 대전의 잘못된 처리가 2차 대전을 불러왔다는 것이 역사적 평가이다. 윌슨도 그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타협을 거부한 정치인에게 부과되는 역사적 문책이다. 타협 없는 정치는 모두를 역사의 패자로 만들 뿐이다.
 

 

※외부필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ㅊ

키워드

#N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