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의 리 장군은 계급장을

떼이지도, 무장해제를 당하지도 않았다

상대를 끌어안는 화해와 포용의 리더십은 링컨에게만 가능한 것일까?

김남균 평택대 미국학과 교수

[평택시민신문] 지난 2월 5일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국정연설(the state of the union address)을 했다. 대통령의 국정연설은 헌법에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미국 정치의 오래된 전통이다. 국정연설에서 트럼프는 화합을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은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여야가 대치하고 있다. 트럼프가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될지 의문이다. 그러나 미국 역사 속에는 지금보다 더욱 심각한 분열을 극복하고 성공한 대통령도 있었다. 아브라함 링컨이다. 링컨은 임기의 대부분을 남북전쟁, 즉 내전으로 보냈다. 그러나 링컨은 위대한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865년 4월 9일, 미국의 내전이 끝났다. 남부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Robert Lee) 장군은 버지니아 주 아포마톡스(Appomattox)에서 항복했다. 상대는 연방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Grant)장군이었다. 1861년 4월부터 만 4년 동안 미국은 내전의 고통에 시달렸다. 당연히 전쟁의 피해도 컸다. 건물과 토지와 같은 재산 피해는 둘째 치고 전사자만 60만 명에 이르렀다. 이것은 미국이 1차 대전과 2차 대전 그리고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잃은 전사자 수를 모두 합친 수보다 많았다. 당시 미국의 총 인구는 약 3천만 명 정도였다. 피해의 규모만큼 상대방에 대한 원한도 컸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반란의 괴수들은 즉결 처분되는 경우가 많았다. 반란을 모의만 하여도 사형에 처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나마 승자가 패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재판을 받게 하는 정도였다. 이런 경우도 대부분의 반란군 지도자들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반란의 최고 지도자에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었다. 반란에 가담한 친족 때문에 가문 전체가 멸족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반란 지역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반란은 반드시 패자에 대한 처벌로 끝이 난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준다.

아포마톡스에서 항복한 남부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식적으로 볼 때 항복한 리 장군은 미국 국내법에 따라 반란군의 괴수로 수갑을 차고 유치장에 갇혀야 했다. 아니면 남부를 교전단체로 인정한다면 리 장군은 국제법에 따라 무장해제를 당한 후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어야 했다. 그러나 리 장군은 계급장을 떼이지도 않았고 무장해제를 당하지도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는 자신이 타고 왔던 말을 타고 되돌아갔다. 나중에 리 장군은 버지니아 주에 있는 대학(지금의 Washington and Lee University)의 총장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리 장군만 예외적인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니다. 연방 대통령 링컨은 남부 지도자 중 누구에게도 반란의 책임을 물을 마음이 없었다.

남북전쟁 중 링컨은 반란을 일으킨 남부지역이 연방으로 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했다. 해당 주에 거주하는 주민의 10퍼센트만 찬성한다면 조건 없이 연방에 복귀시킨다는 계획이었다. 특히 그는 1865년 3월 초에 있었던 제 2차 대통령 취임식에서 패배가 확실한 남부에 대한 ‘자비’를 강조했다. 따라서 연방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은 항복한 리 장군을 아무 책임도 묻지 않고 남부로 돌려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항복한 다른 남부군들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1865년 4월 14일 링컨이 암살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남부에 대한 복수심이 폭발했다. 남부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는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그는 2년간 옥고를 겪었다. 연방군이 점령한 남부지역은 그 후 10년 넘게 연방군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 1877년에야 남부에 대한 연방군의 군정이 종식되었다. 링컨이 암살되기 전에 발표한 계획과는 매우 다른 정책들이었다.

현재 워싱턴 한 복판에 있는 거대한 링컨 기념관의 양쪽 벽에 두 개의 링컨 연설문이 새겨져 있다. 입구의 왼쪽 벽에는 게티즈버그 연설문, 그리고 오른쪽 벽에는 2차 취임연설이 음각되어 있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11월에 행한 연설이다.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링컨은 전사자들을 추모하면서 내전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말했다. 무엇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부분은 민주주의의 요체를 밝힌 명연설로 평가된다.

그러나 링컨 리더십의 진면목은 그의 2차 취임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2차 취임식은 1865년 3월 4일에 있었다. 내전의 끝이 보이던 시기였다. 링컨은 2차 취임연설에서 반란군에 대한 법적 단죄나 정의의 실현을 부르짖지 않았다. 대신 그는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든 사람을 위한 자비(With malice toward none; with charity for all)”를 강조했다. 미국인들이 신성한 장소로 여기는 링컨 기념관(링컨 기념관에는 ‘temple(성전)’이라 적혀 있음)에 새겨진 2차 취임연설은 링컨의 위대한 점이 그의 능력만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만든 보다 중요한 이유는 패자에게 베푼 ‘자비’였던 것이다. 상대를 끌어안는 화해와 포용의 리더십은 링컨에게만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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