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의 독립운동사』 발간 앞두고
명단 든 선조들의 후손들은 증빙자료 제출하면 운동사에 기록 남길 수 있어
네티즌의 힘으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자는 운동이 범국민적인 동의를 얻어내며 큰 반향을 얻고 있는 것과 발 맞춰 평택시도 2003년도부터 추진해오고 있는『평택의 독립운동사』발간계획을 구체화하고 있어 지역에서 일제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선조를 둔 후손들의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가 요망되고 있다.
평택시는 지난해 3월 시장을 위원장으로 6명의 위원과 1명의 상임위원으로 독립운동사 정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역독립운동 사료발굴에 나섰으며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된 인물과 지역, 유적지 등 총체적 수집에 착수했다.
수집하고 있는 자료는 일제당시 신문에 보도된 지역관련 독립운동 자료와 문헌자료, 생존자 증언, 수형(재판)기록, 독립운동 유적지 사진 등이며 현장조사외에 국사편찬위원회, 보훈처, 독립기념관, 경찰청, 각종 문헌자료 소장기관을 대상으로 활발한 발굴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특히 1907년 주권수호운동의 하나로 대구에서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던 평택선조 1200여명의 명단을 8개월의 작업 끝에 발굴 조사해 발표하고 그 후손들을 찾아 선조들이 받아 놓은 영수증과 선조의 사진, 활약상 등 확실한 증빙자료를 독립운동사에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에 적극 나섰다.
추진위원회 관계자들과 시청 문화공보과 관계자들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 당시 발간되었던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등 각종 신문 기사 자료를 하나 하나 확인하는 작업을 통해 평택시민의 이름을 찾아내고 정리를 마쳤다.
이번에 발표된 국채보상운동 참여 평택주민의 기탁내용을 보면 총16개면 47개리, 주민 1142명, 543원 94전이라는 막대한 금액이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던 1907년에서 1908년 당시 평택 대다수의 주민들이 쌈지돈을 내 놓으면서 까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당시 진위군 보통학교교사 윤대선은 구국의 일념으로 국채보상회 연의문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하여 평택주민은 물론 일반국민들에게 일제의 빚을 갚는 일에 귀감이 되었으며 타 시·군에 비해 압도적인 참여율을 보여주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평택시 문화계 박장호계장은 “현재 추진위에서 활발하게 발굴조사 작업을 펼치고 있는데 독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던 선조들의 명단을 확보하더라도 6·25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된 재적과 호적으로 인해 진위면과 포승 현덕 면사무소 지역을 제외하고 다른 읍·면·동 지역에서는 1954년도 새로 만들어진 재적과 호적을 참고로 선조들의 후손을 찾아내는데 어려움이 있다며 국가의 독립과 주권수호운동에 앞장섰던 자랑스런 선조를 두신 후손여러분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참여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이 아니고 3·1만세운동 등 여러 가지 독립운동에 관여했던 조상을 두신 후손들이 지역에 살고 계신다면 반드시 조상들의 업적이 앞으로 발간될 독립운동사에 기록될 수 있도록 증빙자료를 제출해 줄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현재 추진하고 있는 『평택의 독립운동사』는 시청 문화공보과에서 주관하고 평택시문화원에서 집행하며 및 약 500~600쪽 규모로 올 연말 중에 발간될 예정이다.
이번에 발표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던 평택주민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국채보상운동이란?
1907년 2월 대구에서 일기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의 경제침략에서 벗어나려는 항일애국운동이다.
천주교 지도자인 서상돈이 당시 광문사라는 인쇄소를 경영하던 김광제 등 16명과 제휴하여 일으켜 2천만 동포의 애국심에 불을 질렀다.
1904년 고문정치이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고 통감부는 이 차관을 한국민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경찰기구의 확장 등 일제침략을 위한 투자와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시설에 충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907년 한국정부가 짊어진 외채는 총 1300만원이나 되었고 당시 한국정부의 세입액에 비해 세출부족액은 77만여 원이나 되는 적자예산으로서 거액의 외채상환은 불가능한 처지였다.
이에 주권수호운동차원에서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운동으로 직위와 신분에 관계없이 각계각층에서 쌈지돈을 풀고 의연금을 모아 국권을 수호하고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이 운동을 극력 탄압 금지하였으며 송병준 등이 지휘하던 매국단체인 일진회의 공격과 통감부에서 국재보상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등 방해로 인해 더 이상 진전 없이 좌절되었다.
하지만 1910년 한일합방이후 식민지로 전락한 뒤에도 민족해방운동으로 계승 발전되는 초석이 되었다.
우리지역에서도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의연금을 기탁하였고 신문사별로 보면 황성신문에 (1907년 3월 10일부터 1908년 1월12사이) 10건에 총 560명이 201원25전의 의연금을 기탁하였고 만세보에(1907년 4월 11일부터 1907년 5월30일 사이) 8건에 총 338명이 170전 75전을 기탁하였고 대한매일신보에 (1907년 4월27일부터 1907년 8월3일까지) 총 10건에 244명이 170원94전을 기탁함으로 우리지역 주민의 뜨거운 애국정신을 엿 볼 수 있다.
<평택의 독립운동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