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평택 인물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의 한글수호운동 영상화, 영화 『말모이』

우리말을 지켰던 ‘만세 안재홍’ 비열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아

[평택시민신문]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람들의 항일 말글운동을 영상화한 엄유나 감독의 영화 『말모이』가 새해 초 극장가에 잔잔한 돌풍을 일으키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개봉 15일 만에 240만 가까운 관객을 끌어모은 이 영화는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일제강점기 한국영화의 지평을 한차원 끌어올리며 우리말의 소중함과 고난의 시대 한글 수호에 힘쓴 선각자들의 삶을 새로운 영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연초 지인의 소개로 『시네21』 편집장을 지낸 소설가 조선희 작가를 만났다. 조작가는 영화 『말모이』가 최근 수년간 나온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중에 몇가지 측면에서 수작이라고 평가했다. 한가지만 꼽으라면 대개 무장독립군을 소재로 독립운동가들의 일제에 대한 항쟁을 다루는 과정이 소재가 된 기존 영화와는 달리 우리말이라는 다소 생소한 주제를 영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내면서 전 계층의 관객들에게 의미있는 감동을 준 것이 이 영화의 강점이라는 것이다.

 

조선어표준어 사정위원회 (1935년 1월 4일, 온양온천) 둘째줄 오른쪽에서 4번째가 민세 안재홍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와 조선어학회 사람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올해는 1929년 108명의 발기로 한글 수호·보급운동의 하나로 국어사전 편찬을 위해 만든 조선어사전편찬회가 만들어진 지 90주년이 되는 해다. 후에 조선어학회 활동의 근간이 되는 이 조직은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외래어표기법 통일안> 등을 발표, 우리말 사전 편찬사업을 꾸준히 진행했다.

이 영화에서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윤계상 분)은 당시 조선어학회 간사장으로 독일 유학후 이 학회의 한글운동을 이끈 고루 이극로이다. 영화를 보면서 고루와 뜻을 함께한 외솔 최현배, 일석 이희승, 열운 장지영, 기농 정세권 등과 1942년 일제가 날조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중에서 고문으로 돌아가신 이윤재, 한징 등 조선어학회 순국선열들의 치열한 삶에 다시금 고마움을 느꼈다.

 

아산 현충사에서 함께한 조선어학회회원들(1935). 두 번째줄 가운데 안경쓴 사람이 민세 안재홍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 가 아산에서 열린 이유

영화 끝에 스틸 사진으로 1935년 1월 4일 온양온천에서 찍은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참가 회원 기념사진도 자료 화면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첫줄에 이극로가 앉아있고 둘째줄에 옥사하신 이윤재, 1929년 조선일보 문화부장으로 한글보급운동을 이끈 장지영의 얼굴도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반가운 얼굴이 하나 보인다. 바로 우리 고장 평택 출신의 민세 안재홍 이다.

민세가 조선어학회의 말모이(사전) 편찬 작업에 함께 한 조선어학회 순국선열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 관계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날 온천 모임 이후 장소를 이동해서 간 곳이 바로 아산 현충사였다. 새해 벽두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의 모임을 아산으로 정한 것은 안재홍의 영향이나 제안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민세는 이 시기 조선학운동을 선구적으로 주창하며 충무공 정신 재발견에도 나선다. 당시 자료를 보면 일제강점기 충무공정신 선양에 가장 앞장섰던 인물이 민세였다고 한다. 이 말모이 모임 회원들의 아산 현충사행은 민세가 조선정신의 구현자로 표현한 충무공의 뜻을 따르겠다는 비장한 각오의 표현이기도 하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당한 인사들의 모임인 십일회 기념 사진 . 첫줄 왼쪽에서 3번째가 민세 안재홍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말모이 편찬작업에 함께한 민세 안재홍

조선어학회 회원이자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안재홍은 언론과 교육활동을 통해 한글 수호에 힘썼다. 또한 안재홍은 일찍이 일본의 일어편중 교육을‘의붓자식 교육’이라고 비판하고 일본인이 강대한 권력의 압박으로 조선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의 보급을 조장하여 동화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공허한 망상이라고 주장했다. 민세는 한글을 우리말과 소리에 가장 잘 걸맞도록 우리의 자연스러운 핏줄과 뼛골에서 우러나온 민족문화의 거룩한 보배라고 평가했다. 민세는 한글보급운동의 전개, 조선어사전 편찬의 촉진, 한글날 제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안재홍은 민족 정체성의 핵심어로 ‘민족 정기’를 주장했으며 그 뿌리가 되는 것은 한글과 조선 역사라고 확신했다.

또한 민세는 ‘조선어사전완성론’이라는 글을 통해 조선 어문의 정리와 통일은 낙관적이지만 자금의 부족이 있으니 어문 정리의 완성과 그 구체적 실천으로 조선어사전의 편찬과 간행에 각계의 후원과 동참을 호소했다.

 

일제강점기 최대 조선어 보급운동을 실천한 안재홍의 한글사랑

민세 안재홍은 1929년 7월 14일부터 실시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조선일보 문자보급운동도 적극 추진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 10월 국세조사에 의하면 당시 경기·충북·충남·전북·전남·황해 등 6도에서 한글·일어 독서 불능자는 남자 63.5%, 여자 89.5%로 평균 76.1%가 문맹자였다. 이 운동에는 첫해인 1929년에 409명이 참여했으며 이 때 기초 한글을 깨우친 사람은 2천 849명이었다. 1930년에는 1만 567명이 한글을 깨우쳤다. 1931년에는 문자보급반 강좌를 개설하고 한글원본 20만부를 인쇄하여 전국 300여 지국에 무료 배포했으며, 강습생은 2만 8백명으로 늘었다.

안재홍은 민족교육의 기초를 문맹퇴치로 보고, 이들의 배움에 대한 열망을 자극해야 진정한 독립의 토대가 형성 될 것으로 보았다. 이는 누구나 가장 쉽게 참여해서 성과를 낼수 있는, 이를 통해 배우는 즐거움을 느껴 더 높은 학습 과제를 성취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져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강화시키고자 했다.

 

우리말을 가꾸고 우리말로 철학하기를 실천한 안재홍 노력

또한 민세는 일제 한글 탄압에 맞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우리말로 생각하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실천했다. 민세의 저서 조선상고사감은 역사자료로서 복원하기 힘든 한국고대사를 다양한 지명에 대한 분석과 어원 연구를 통해 밝혀내려는 지식인의 열정이 담긴 책이다. 그는 전국 각지와 고향 평택의 여러 지명에 대한 어원도 연구했다. 예컨대 평택 부락산의 어원을 부락=ᄇᆞᆰ(빛)으로 추정했다. 그가 추구한 신민족주의의 핵심인 다사리 정신도 서구 민주주의의 핵심가치인 자유와 평등의 조선말 표현이기도 하다.

 

안재홍연설사진

민세 안재홍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생애 9번째 투옥

한글을 빛낸 33인이기도 한 그는 우리말 사전 기초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1942년 10월 일제가 한글 탄압을 위해 날조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다. 여기에는 민세와 함께 한글 수호에 힘쓴 이극로, 최현배, 장지영, 이희승, 정세권 등 33명이 함께 옥고를 치른다. 극심한 고문으로 김옥에서 이윤재, 한징 두분이 옥사했고, 민세도 극심한 고문속에 죽음을 결심하고 절명시를 남겼다고 회고하고 있다. 해방후 이 때 수난을 당한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수난의 시작일인 10월 1일을 기억하고자 십일회를 조직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조선어학회 대표 이극로의 빰을 치라는 비열한 고문을 거부한 안재홍

당시 함께 옥고를 치르고 해방을 맞이한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은 1915년 민세가 중앙학교 학감 시절 담임반 학생이었다. 일석은 감옥에 있을 당시 민세의 조선 선비다운 행동을 회고하고 있다.

이희승 선생이 전한 민세 선생의 행장 중에는 여러 가지 풍부한 일화거리를 남기셨지만 기록에도 남지 않고 오늘날 잘 전해지지 않는 한토막을 여기에 피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민세 선생이 당한 정신적 고문 가운데 하나는 조선어학회의 간사장(대표자)인 이극로에 대한 문초를 선생에게 시키면서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뺨을 때리라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우는 참으로 진퇴유곡으로 난처한 궁지에 몰리는 일이 된다.

이극로의 뺨을 때리자니 친한 친구간에 차마 못할 노릇이요 아니 때리자니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져 기막힌 고문이 자신에게 가하여질 것이 불을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한 노릇이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자기 자신의 재난을 피하기 위하여 친구의 뺨을 한번쯤 때기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민세 선생은 정색을 하면서 ‘나는 죽으면 죽었지 저 친구 뺨은 칠 수가 없소’하고 거절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다시 한 번 민세 선생의 고매한 인격에 탄복하였다.

 

조선어학회 사람들과 안재홍의 한글 사랑 참뜻 알리기 위한 시민교육 필요

올해는 3.1운동 100년이자, 조선백성들의 열망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 해보다 고난의 시대 이 나라를 지키고자 자기 희생을 다한 선열들의 실천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미래 세대에 알려나가는 것의 소중함을 내내 마음에 새길 때이다. 우리는 세계 11개의 문자를 가진 민족가운데 한 나라이다. 그런 소중한 문자에 담긴 정신을 지키고 가꾸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며 멀리 가기위해 함께 가려고 노력한 조선어학회 순국선열들의 선구적 실천과 고귀한 희생이 영화를 넘어서 우리 삶속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도록 지혜를 모아나가야 할 것이다.

황우갑 시민전문기자

아울러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사학자 등으로 활동하며 철저히 항일을 실천한 민세 안재홍의 넓고 깊은 우리말 사랑도 널리 알려질수 있도록 지속적인 지역시민 청소년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의미에서 향후 고덕 국제신도시 안재홍 생가 주변 역사공원· 기념관 조성은 평택사람들에게 커다란 자부심을 심어줄 지역의 상징적인 자산이 될수 있을 것이다.

 

황우갑 시민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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