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음악의 영웅’이라는 사람의 그림자

아버지는 평생 국악 발전과 후학 양성에 헌신하신 순수한 분

공정하고 바르게 선양사업 진행한다는 전제하에 평택시 응원

 

[평택시민신문]  평택출신 국악 명인 지영희선생을 선양하는 사업이 평택시를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지영희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로 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는 등 국악 현대화에도 힘써 “근대음악의 큰 산맥”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보유자로 인간문화재가 되었으나, 1974년 새로운 국악 단체의 설립을 주도하다 당시 국악협회와의 갈등으로 본의 아니게 하와이로 떠나게 된 후 끝내 1980년 2월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가야금 명인이었던 부인 성금연씨 역시 1986년 하와이에서 삶을 마감했다. 이후 재조명 활동이 평택시를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어 2017년 정부로부터 "은관 문화 훈장“을 추서받았다. 평택시는 지영희와 평택국악을 평택의 상징적 문화콘텐츠로 발전시키기 위해 지난 5월 ‘지영희 문화관광사업 연구용역’ 최종 보고회를 갖고 평택에 ‘근대 음악 아카이브관’ 건립, ‘경기만 민속악벨트’ 조성사업,  ‘국제 시나위 페스티벌’ 개최 등을 추진한다는 중장기 종합 계획을 수립하고, 올 추경예산에 평택호 한국소리터에 ‘근대음악 아카이브관’ 건립을 위한 예산 10억 원을 확보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영희 선생의 장남으로 지영희선생과 하와이 생활을 함께 한 지재현씨가 본지에 글을 보내왔다. 지재현씨는 이 글을 통해 지영희 선생의 장손으로 평택시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선양사업이 바르고 공정하게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애틋한 마음 등을 담았다. 지영희 선생의 인간적 면모를 평택시민에게 알리고 선양사업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본지는 이 기고를 지면에 싣는다.

 

지영희 명인의 장손 지재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

1974년 4월 어느날, 유난히 화창했었던 이날은 별로 기억하고 싶은 날이 아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어두운 표정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부모님을 모시고 갑자기 이민을 떠나야 했다. 아직 학생이었던 나에게 아버지의 한마디, “먼저 가 있을테니 모든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곧 바로 따라 들어오라" 이 말씀을 주시고 비행기를 타러 가셨다. 그 때 아버지의 발걸음이 왜 그리 무거우셨는지 철없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시기 전, 아버지께서 뒤돌아보시는 무언가 맺힌 듯한 안타까운 그 모습은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뒤 8개월 후 나는 막내누이와 같이 부모님이 계시는 미국 하와이로 떠나게 되었다. 두 개의 커다란 이민 가방에 등 뒤에는 옛날 무사가 칼을 두른 것처럼 해금을 애지중지 매었다. 그 모습이 참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그 때 칼처럼 등에 맨 해금이 평상시 아버지께서 사용하시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급한 마음이셨으면 평소 몸보다 더 중히 여기시던 해금조차 챙기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버지는 하와이 생활 내내 아무 말씀 없이 그저 음악에만 전념하셨다. 아들이라고 누나들보다는 많이 챙겨주셨지만 워낙 자식들에게는 무뚝뚝 하셨다. 하지만 제자들이나 음악을 대하실 때는 다른 사람처럼 열정적이신 그 모습이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그때까지도 난 아버지께서 왜 갑자기 이민을 오셨는지 알지 못했다. 후에 뒤따라 이민 온 누님들을 통해 그 이유를 들을 수가 있었다. 아버지의 그 통한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말이다.

1977년 지재현 씨가 미해병대 입대하는 날 공항에서 부모님과 촬영한 사진. 오른쪽부터 지영희 명인, 성금연 가야금 명인, 지재현 씨.

 

어린 내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아버지의 한

국내 국악계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기존 국악계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를 시기하고 질투했고 급기야 제거하고 싶어 했다. 한국을 떠나지 않으면 감옥으로 보낸다는 협박까지 했고 아버지는 연로하시고 지치시어 결국 먼 나라로 밀려나고 말았다. 평소 내가 지영희 아들이라고 이뻐해주시고 아껴주시던 아버지의 동료와 제자분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항상 모든 제자들에게 "너희는 굿판으로 나가서 돈 벌 생각 말고 열심히 실력을 닦아 대학 교수가 되어 당당하게 제자들을 양성하라" 말씀하셨다. 제자들을 진심으로 아끼셨다. 아버지와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힘든 시절을 함께 보내던, 함께 국악을 나라의 흥하는 음악으로 만들자던 그 분들이 아버지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다고 한다. 친구였고 가족 같았던 그 분들이 우리 가정을 이렇게 해외로 몰아내게 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어렸고 몸은 이미 먼 나라에 있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원망했고 고통스러워만 했다.

60여 년 동안 한국 민속음악을 연구하시고 자신이나 가족보다 제자와 동료를 먼저 아꼈던 분이 바로 내 아버지였다. 그런 분이 늙어 말년에 하와이 땅으로 와 낯설고 어려운 영어공부를 하셨으니 아버지는 얼마나 참담하셨을까. 하지만 하와이에서도 아버지는 매일 아침 일어나 음악을 틀어놓고 항상 오선보에 음악을 적는 작업을 하셨다. 그러면서 가끔 창문을 내다보며 창공으로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셨다. 혼잣말로 “나는 언제쯤 고국으로 돌아갈꺼나” 하시면서 깊게 한숨을 내쉬던 모습을 보곤 했다.

 

“지영희 선생의 장손으로, 유족의 대표로

평택시를 제외한 어느 단체에게도 아버지의

함자를 사용을 해도 된다는 허락을 해 준 곳은 없다”

 

큰 감격의 순간

지난 2017년 12월 나에게는 너무나 큰 감격의 순간이 있었다. 고국에서 버림을 받으시고 하와이로 이민 가신지 43년의 시간.  평택시의 지영희에 대한 열정과 노력으로 드디어 한국 정부로부터 다시 인정을 받아 ‘은관 문화 훈장’을 추서 받으셨다. 장손인 내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수상을 하였다. 그리고 2018년에는 ‘국립 무형 유산원’에 550명 인간문화재 가운데 엄선된 40인 중 한 사람으로 지정이 되어 당당히 전시관에 입성을 하셨다. 그리고 2018년 10월에는 평택시 한국소리터에 동상이 제막되었다. 내 아버지의 한이 씻긴 것 같은 감격이 밀려왔다. 이 영광스런 순간이 있기까지 쉽지만은 않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노동은 교수님이 그동안 은폐 되었던 지영희를 세상에 알렸고 평택시 담당자분도 지영희의 업적을 알리는데 각고의 노력을 하셨다. ‘지영희국악관’에 근무하시는 문화해설사분들의 헌신도 잊을 수가 없다.  그중 한 해설사님께서는 지영희 선생의 모습을 재연하는데 몸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한복 입은 그 분의 모습이 생전 아버지와 너무 똑같아서 너무 놀라울 정도였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지킬 것이다.

그 이후에 평택시에서 ‘지영희 업적 알리기 사업’은 활기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업적이 세상에 드러날수록 아버지 이름을 빌어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다시 또 생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하와이로 간 뒤, 아버지의 작품과 업적들을 일부 제자가 자신의 업적이라며 가로채간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다. 그 제자들은 아버지의 업적으로 지금까지 이름을 날리며 배불리 살고 있다. 그 통한의 기억이 다시 재생되는 듯했다. 지금도 아버지의 이름을 빙자해 사업비를 따내려는 집단들이 있다. 모 단체에서는 유족 한 사람의 의견이 유족 전체의 의견인양 제멋대로 말하면서 버젓이 자신들의 이익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 단체의 예산 사용 등의 다른 비리에 대한 논란도 이미 알고 있는 터이다.

지영희 선생의 장손으로, 유족의 대표로 평택시를 제외한 어느 단체에게도 아버지의 함자를 사용을 해도 된다는 허락을 해 준 곳은 없다. 평택시는 지영희를 알려 우리음악을 대중화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고 나 또한 응원한다. 시의 예산은 시민들의 혈세이다. 예산은 철저히 정당하게 쓰여야 하며 온당한 법적 정의에 따라야 한다. 지영희 이름이 들어간 정체불명의 단체들이 평택시에 예산을 신청한다고 무작정 수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으로 그 어느 누구도 유족의 허락 없이 아버님 함자를 함부로 사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제 유족의 대표로서 나는 그런 단체는 초상권 침해로 강력히 법적대응을 할 것이다.

 

평택시가 공명정대하게 앞장서주길

그 동안 평택시가 지영희 사업을 이만큼 성과를 보인 점 깊이 감사한다. 평택시 덕분에 아버지의 숨은 업적들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평택시가 공정하고 바르게 사업을 진행한다는 전제하에 평택시를 응원한다. 아버지의 이름을 붙여 자신의 사욕을 챙기려는 단체는 배격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 앞으로 지영희 업적 알리기 사업은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지영희의 발전이 곧 국악의 발전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 자신의 모든 걸 제자들에게 무상으로 퍼주셨다. 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은 직접 우리 집에 재우고 먹이며 공부를 시키셨다. 자신이 작곡한 곡도 누구나 국악을 공부하겠다면 그냥 내어주셨다. 그것이 지금엔 당신의 작품을 빼앗긴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참 순수하셨다. 그 분을 더 이상 욕보여서는 안 된다.

아버지가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 모습이 생각난다. 맞지도 않는 서양 침대생활에 불편해하시다 떨어져 발을 다치셔서 급히 병원으로 갔다. 그 때 내가 아버지를 등에 업고 뛰었다. 아버지는 난생 처음 아들 등에 업히셨다면서 내 아들 등 참 넓고 든든하다, 고맙다 말씀하셨다. 그 것이 내가 아버지와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스킨십이었다. 평생 제자들만 챙기셨으니 아마도 자식인 내게 미안하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끝내 그리 가고 싶어 하셨던 고국 땅을 밟지 못하시고 떠나셨다. 평소 아버지의 꿈은 국악이 세계 속에 우뚝 서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꿈처럼 정말로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후손인 우리들이 국악을 아끼고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평택시에서 공정하게 지영희 사업을 추진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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