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성 경 <송탄여중 교사>

꽤 바람직한 일이고 재미도 있어서인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김선생은 언제 나와?’라는 가벼운 질문을 받기도 한다.
오래 전부터 존대어를 주로 써오던 나는, ‘글쎄 말이예요. 애들이 신청을 안하나 봐요.’하며 웃어넘긴다.
진담 반 농담 반 이야기가 흐르면서, ‘TV에 출연하신 선생님들이 비단 존대어 때문에 학생들로부터 추천받았겠느냐?’는 이야기로 그 분들의 열정과 학생 사랑을 가늠한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추천하고픈 선생님이 계시다.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 누가 내게 ‘왜, 선생님이 되었냐?’고 물어오면 늘 대답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시는 ‘한상무 선생님’.
1971년 9월 어느 날. 당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운동장 조회가 열렸다.
조회가 있기 전에 선생님들께서는 아침 회의를 하셨고, 그 동안 아이들은 학교 이 곳 저 곳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날은 친구와 함께 건물 뒤편에 있는 자연학습원에 가서 학교에서 키우고 있는 동물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못 보던 물고기 두 마리가 어항에 있었다.
커다랗고 좀 흉측하기는 했지만 다른 물고기(후에 알고 보니 가물치였다.)와는 좀 달랐다.
친구랑 나는 요리조리 살펴보느라 신이 났다.
그런데 친구가 갑자기 내기를 하자고 했다.
“어느 물고기가 더 큰 것 같아?”
“저거”
“난, 이거.”
“그래? 그럼, 내기하자. 카스테라 내기다?”
내기가 시작되고 한참을 물고기 크기를 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별 짓을 다 해도 돌아다니는 물고기 크기를 어항 밖에서 가늠할 수가 없었다. 급기야 꺼내서 재기로 했다.
친구와 나는 어항 속에 손을 넣고 서로의 물고기를 잡으려 무척 애를 썼다. 그 때,
“야, 이녀석들!”
교감선생님이셨다.
우리는 교무실로 끌려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교무실 출입은 마음 졸이는 일이었는데, 선생님들 아침 회의 시간이었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교무실은 왜 그리 넓어보이던지. 넋이 빠져있는데 뭐라고 다그치시는 교감선생님 말씀. 그 말씀을 귀에 담기도 전에 뜨끔해지는 뺨과 번쩍이는 별들. 반사적으로,
“그게 아니라 그저 크기를 재보려고 한……”.
그리고는 몇 차례 더 교무실 풍경이 출렁였다.
“너희 같은 놈들이 있어서 동물들이 오래 못살고 죽는거야.”
‘아, 우리 담임선생님도 혼나시겠구나.’
그 순간에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무튼 억울한 마음에 앞서 곤란해지실 담임선생님과 그로 인해 혼날 일을 생각하니 눈물 뺄 여유조차 없었다.
“나가.”
라는 교감선생님 말씀에 교무실을 나선 우리는 씩씩거리며 억울한 맘을 토해냈고, 우리가 저지른 일에 대해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신 교감선생님을 성토하며 교실로 향했다.
조회 시간 내내 텅 빈 교실에서 오만가지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아이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담임선생님께서도 들어오셨다.
난 졸인 마음으로 교탁 앞에 서신 선생님의 얼굴을 살폈다.
여느 때처럼 온화한 표정에 특유의 입술 움직임을 보이시던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참 길게 느껴졌다.
“성경아, 왜 그랬니?”
기대치 못한 부드러운 말씀에,
“저는 그냥……”,
말을 잇지 못하고 막혔던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흐느꼈나?
“앉아라.”
얼마나 흐느꼈는지 모르겠다.
내가 흐느끼는 동안에도 아이들을 향한 선생님의 잔잔하고 훈훈한 평상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지금도.
32년이 흐른 지금까지 선생님께, ‘내가 왜 그랬는지.’ 말씀을 못 드렸다.
선생님께서도 묻지 않으셨다.
몇 번을 만나 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망설이다 돌아서고 말았다.
하지만 그 ‘용서’가 지금 나로 하여금 아이들을 믿게 하고 용서하게 한다.
이성이 머리를 맑게 한다면 마음은 감성으로 자라는 것이 아닐까?
깨비1, 깨비2, 잠만보, 코비, 엄뽕, 팔개. 아이들에게 붙여준 별명들이다.
놀리면 아이들은 “배둘레햄”하며 되 놀린다.
우리는 그렇게 웃고 산다. 때로는 다투기도 하지만.
<교단에서 온 편지>
평택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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