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서의 사진 남겨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죠”

영웅바위 사진을 설명하고 있는 유갑목 삼원과학 대표

기묘사화까지 거슬러 오르는 기록 애착의 이유

평택항 개발 전후 모습 사진으로 남겨

[평택시민신문] 1519년, 중종 14년. 조광조 등 사림파 세력은 중종반정의 공신 중 자격이 없는 인물 76명에 대해 그 공훈을 삭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는 당시 권력의 핵심이던 훈구파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으로, 조광조는 공훈을 삭제하는 것으로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이상을 조선에 실현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훈구파는 사림파 세력들이 장차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모함으로 역공을 시도한다. 중종은 훈구파 세력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고, 조광조 등 70여 명의 사림파들에 사약을 내렸다. 이것이 4대 사화 중 하나인 ‘기묘사화’다.

기계유씨 석청 유여매도 성균관 유생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됐다. 당시 사화에 관여된 사람들은 3대까지 멸한다는 소문이 돌자 유여매는 안성으로 피난했고, 안성도 불안하다 하여 1년 만에 지금의 평택 포승읍 신영리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석청 유여매는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겼고, 관련 기록도 일체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석청 유여매에 대한 이야기는 후손들에게 전해졌고, 그 후손들은 가문을 새롭게 일으켰지만, 기계유씨의 새로운 파(派)로 석청 유여매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후손인 유갑목(82) 삼원과학 대표는 “피난으로 내려온 평택에서 자신의 신분을 일체 숨겼고, 기록도 미비했기 때문에 기계유씨의 새로운 공파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관련 문서를 발굴하는 등 유갑목 대표와 그의 선조들의 오랜 노력으로 2015년도에 기계유씨 가문의 새로운 줄기로서 유여매를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그의 후손들은 ‘석청공파’로 불리게 되었다.

아주 오랜 시간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한 가문의 새로운 뿌리로 인정받지 못한 선조를 두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유갑목 대표의 기록에 대한 의지는 남다르다. 자신의 추억이 녹아있는 공간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한 활동을 1950년대 중반 카메라가 흔치 않은 시절부터 해 왔던 것이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친구들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면서 카메라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는 유갑목 대표는 그 이후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사업을 운영할 때도 독학으로 사진을 배우며 기록으로서의 사진을 남겨왔다.

그러던 중 평택, 특히 아산만 일대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산업입지국장이라는 사람이 신문에 기고한 글을 본 적이 있어요. 그 기고에서 그는 현재 평택항이 들어선 자리가 산업입지로 최고의 지역이라고 주장했죠. 그 글을 보고 앞으로 이 지역이 개발되겠구나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아산만변 등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의식을 갖고 사진을 찍었어요.”

실제 유 대표는 서울에서 사업을 운영하면서 틈틈이 고향 집으로 내려와 사진을 찍었다. 아산만 영웅바위를 배경으로 낚싯배가 지나가는 사진, 멍거니 유적지에 정박된 배 사진, 만호리에서 그물을 깃고 있는 어부의 사진, 신영리 갯벌사진 등 평택항 개발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진들이 모두 유갑목 대표의 작품이다.

사진을 보여주며 유 대표는 “이러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과거 아산만 일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에요”라고 말했다.

유갑목 대표가 촬영한 1960년대 만호리 일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어부의 모습

지금도 평택항 홍보관에서 그의 사진을 발견할 수 있다. 유 대표는 “평택항 홍보관이 개관할 때 과거 아산만 일대 사진을 주제로 공모전 같은 걸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70여 점을 출품을 한 적이 있는데, 이중 36점 정도가 채택돼 상금을 받았어요. 그때 출품한 사진들을 평택항 홍보관에서 사용하고 있는거죠”라고 전했다.

유갑목 대표는 “지금 평택은 많은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개발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삶의 터전들이 사라지게 될 텐데 ‘과거의 선조들은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는 기록이 필요해요”라면서 “과거보다 기술이 발전한 만큼 더 생생한 기록을 다양한 사람들이 남겨주길 바랍니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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