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평양에서 열린 평양으로

■ 북한의 실상
1866년 대동강에 미국 셔먼호가 진입했을 당시 셔먼호를 김일성 주석이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 자리에 미국 뚜에볼라호를 전시해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외국인과 관광객에게 보여진다.
북측사람들은 자기네들이 못사는 이유를 미국의 북한압살 정책 때문이란다. 달러 동결 및 원유 수송금지, 외국기업 투자 방해 등 모든 것을 미국 측의 방해공작으로 돌린다.
그러면서도 동구권의 몰락으로부터 북한의 어려움이 시작되었음을 인정하기도 한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북한의 격차가 없었는데 소련의 붕괴와 북한 시스템의 문제로 성장이 계속 지연, 국민소득이 1000달러도 안 되는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가 바로 자기네들이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다.
지금은 강대국의 논리와 약소국이라는 한계 때문이지 환경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 듯 싶다.
옛날 이집트에서 직업도 다양치 않고 먹을 것이 없었던 그 시대에 직업을 주고 양식을 주고자 피라미드라는 대 역사를 고육지책으로 시행하였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본 영화와는 달리 강제노역이 아닌 직업으로서의 공사였다는 것이다.
북한의 개선문이나 김일성 우상화 조형물들도 일종의 그러한 취로사업의 취지가 일부 잊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10차선으로 개설된 차로도 청년들이 중장비 없이 망치로 만들었다고 한다. 망가진 경제에서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주려고 한 고육지책이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 다산정책 장려 -4째 나면 헬기로 수송
평양에서 개성이 160㎞, 다시 판문점까지 8㎞, 다시 서울까지 70㎞, 반나절 거리인 북한은 다산을 정리하고 있다.
4번째 아이를 나면 헬기를 띠워 평양산원까지 옮겨준다. 우리는 인구증가 억제 정책을 쓰는 반면 북한은 다산을 장려하고 있다.
한반도가 세계 중심에 서고 내수가 진작 되려면 인구 1억은 되어야 우리끼리 충분한 소비시장 형성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선군정치, 즉 군대를 우대시 하는 정책 때문에 군입대를 영광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경쟁률도 세고 많은 사람이 희망은 하지만 입대는 선택된 사람만이 가능하다.
즉 희망제이지 의무제가 아닌 것이다.
■ 아! 고구려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는 동쪽을 밝힌 왕이라는 뜻의 동명왕으로 불리었으며 그가 묻힌 고주몽이 세운 동명왕릉은 평양에서 20분 거리에 있다.
동명왕은 기원전 214년 5월 14일 출생, 40세에 전쟁터에서 사망했고 장수왕 때 현재의 능으로 옮겨졌다.
유골 및 유물은 다 도굴 당하고 능 안에는 연꽃무늬만 있다.
주변에는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합장묘가 있다. 동명왕의 벽화에 윷놀이가 새겨져 있고 윷놀이의 유래는 2000년이 넘는단다.
돌아오는 길에 일행은 가을 하늘을 흠뻑 만끽하면서 이처럼 화창한 날은 처음이라는 말에 다들 공감했다.
거리에서 만개한 코스모스는 어렸을 때의 냄새와 정취가 느껴져 가슴을 아리게 한다.
가을걷이가 한참인 북녘 땅, 남한보다는 더 온화하고 각박함이 없어 보이는 여유로운 느낌이 참 좋다.
우리보다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순간 해본다.
■ 평양의 상징은 대동강과 모란봉
평양의 크기는 2300㎢, 평택의 4배 가까이 된다. 인구는 200만 명이다.
6·25때 42만발의 폭격으로 완전 폐허가 되고 2층 건물 1채만 남아 있다. 아이러니 하지만 그 덕에 지금의 모든 도로는 10차선으로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원유가 부족해 시내에는 차가 거의 없고 아파트들도 오후 6시 30분까지는 불을 켜지 않는다.
완공이 되면 세계의 자랑거리가 될 105층 류경호텔은 철골 철근 콘크리트만 완성된 채로 10년째 방치되고 있다.
어디에서나 봐도 보이는 유일하게 높은 건물이다. 어쨌든 빨리 완성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평양은 ‘류경’이라고도 불리운다.
얼마전 완공된 ‘류경 정주영호텔 등의 ’류경‘의 뜻은 ’버드나무 서울‘이라는 뜻의 한자다.
그만큼 버드나무가 평양을 상징하듯 강가에 온통 버드나무 천지다.
인민내 학습당은 우리의 국립중앙도서관에 준하는데 보관장서가 3500만 부가 된다.
참고로 우리의 국립중앙도서관에는 467만여권의 장서가 비치되어 있다고 한다.
1988년에 세워진 봉수교회(모호순 목사)는 600평 땅에 수요인원이 350명이다.
많을 때는 평양에 교회가 1400여개가 있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웠다 한다.
목사가 성경책을 한국돈 5만원에 팔고 있다. 사주었으면 하는 눈치다.
수재만 들어갈 수 있다는 김일성 대학은 교직원 5000명에 학생 1만2천명이다.
북한 가이드 3명중 한 명이 김일성 대학 출신인데 자부심이 대단하다.
■ 고증된 단군릉
단군릉은 해방 후 북한 고고학계가 내세우는 최대의 업적이다.
이에 반해 남측의 역사학자들은 이미 단군릉의 허구성을 성토하는 글을 여러 명이 발표했고 북한의 단군릉 발굴보고에 동의하는 학자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유로는 단군의 고조선은 평양이 아니라 랴오뚱지역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영역이 랴오뚱이 아니라 평양을 중심으로 펼쳐졌다고 믿는 학자들이 줄곧 있어왔다.
이들은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현서쪽 3리에 둘레 140자나 되는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단군묘’라고 한다”는 기록에 주목한다.
또 ‘조선왕조실록’의 숙종때(1697년) 강동의 ‘단군문 수리’ 얘기가 나오고 정조때 평안감사에게 ‘단군문 제사’를 제도화하라는 지시사항이 나온다.
게다가 단군릉 일대에는 대박산(밝은 산)을 비롯해 단군호, 단군동 등 단군과 관계된 지명과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논쟁이 오가던중 김일성 주석이 논쟁만 하지말고 발굴해서 과학적으로 규명하라며 「단군릉 발굴에 관한 교시」를 내렸다.
발굴결과 놀랍게도 두 사람의 뼈가 모두 68개나 나왔다. 사회과학원에서 서로 다른 두 연구기관에 연대측정을 의뢰하여 전자스핀(SPIN) 공명법으로 측정한 결과 1993년 기준으로 5011±267년이라는 값을 얻게되었다는 것이다.
금관도 더불어 발굴되 그 인골은 다름 아닌 단군과 그 아내의 뼈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군릉 안에는 두 개의 관을 모셨으며 뼈를 직접 확인하고 싶으면 1인당 달러 100달러을 내야한다는 가이드의 말에 모두 씁쓸한 느낌을 받았다.
능 주변에는 많은 인물 조각상이 있는데 그중 하나의 조각상 이름은 ‘고신네’라고 부르며 후에 ‘고시래’라고 불리는 음식의 신이고 또 하나는 단군의 아들인 ‘부소’인데 후에 ‘부싯돌’이라 불리는 불의 신이다.
<북한기행기>
평택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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