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확산 금지는 미국의 핵심적 대외정책

북한과 미국 대립은 76년 전 미일충돌과 닮은 꼴

파국 방지할 획기적 해결 방안 찾을 지혜 모아야

 

김남균 평택대 미국학과 교수

[평택시민신문] 12월 7일(미국시간)은 진주만 기습 76주년이었다. 1941년 12월 7일(미국시간) 이른 아침, 하와이 진주만은 날벼락을 당했다. 일본의 기습공격에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던 미국의 태평양 함대의 주력함들이 파괴되었다. 2천명이 넘는 인명피해도 있었다. 그 시각 워싱턴은 점심시간이 넘은 한낮이었다. 이튿날 의회에 출석한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일본으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은 것이 미국에게는 “치욕(infamy)”라고 보고했다. 즉각 선전포고안이 의회를 통과했고, 미국은 본격적으로 2차 세계대전에 개입했다.

기습공격이었지만 진주만 공격은 예상된 일이었다. 워싱턴 지도자들은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공격 장소를 대부분 필리핀으로 예상하였다. 하와이가 공격 예상지역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기습’이라는 표현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거기다 공격을 시작한 후에 일본이 미국에 대해 전쟁을 선언하였다는 사실도 ‘기습’이라는 표현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전쟁 자체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 지도층의 인식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공격은 왜 예상된 일이었는가? 미국은 일본의 팽창주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1905년 태프트-카츠라 밀약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당시 국무장관이던 헨리 스팀슨은 소위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발표하면서 일본의 대륙 침략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일본은 미국의 반대를 무시했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중국 본토까지 점령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문호개방정책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미국은 일본의 전쟁확대에 경제제재로 대응했다. 1940년 7월 미국은 일본에 대한 군수용 원자재의 수출금지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제제제 조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면서 침략전쟁을 더욱 확대해 나갔다. 일본이 인도차이나까지 침략하자 1941년 7월 미국은 석유수출 금지와 미국 내 일본재산 동결이라는 강력한 제제 카드를 내놓았다. 당시 일본은 필요한 석유의 거의 90 퍼센트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석유수출 금지조치에 다급해진 일본은 미국과 마지막 협상을 시도했다. 일본은 인도차이나에서 철군을 약속하면서 대신 미국에게 석유의 수출재개를 포함한 경제적 제제의 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반도를 제외하고 일본이 무력으로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정책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기본정책이었다. 군지도자들에 좌우되던 일본도 전쟁을 치르면서 확보한 영토를 그냥 내줄 수도 없었다. 결국 미국과 일본은 무력충돌을 피하지 못했고, 결과는 군국주의 일본의 패망이었다. 미군의 무수한 공습에 핵폭탄까지 투하된 일본에서는 2차 대전 중 약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진주만 기습은 오늘날 한반도 상황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외교원칙으로 내놓고 있다. 핵 확산 금지는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에 대한 미국의 핵심적인 대외정책이다. 핵 확산은 미국에게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한편 북한은 핵보유국의 지위를 요구하고 있다. 양측의 주장에 양보의 여지가 없다는 측면에서 76년 전 미일충돌과 닮은 부분이 있다. 침략으로 영토를 늘려왔던 일본군국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개발해 온 핵을 쉽게 포기할리 없다. 그러나 북한은 일본의 비극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정부나 미국도 파국을 방지할 수 있는 획기적인 해결 방안을 찾아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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