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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절없이 흘러간 11년 세월…여전히 살아내고 있는 대추리 사람들미군기지와 평택-2006년 대추분교 강제집행 후 11년, 대추리는 아직도 살아있다.
문영일 기자 | 승인 2017.05.17 09:46|(863호)

“지척에 두고도 영영 가 볼 수도 없는 고향 생각에 마음 아파”

이제는 공공근로도 농사도 못 짓는 막막한 삶에 깊어가는 한숨

세 번에 걸쳐 내몰린 삶의 터전,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

갯벌을 옥토로 바꾼 저력으로 다시 마을다운 마을 만들어

대추리평화마을 주민 이정오(81), 방효필(78), 강권석(77), 홍광유(70) 씨가 마을 옆 밭에서 농기계를 고치며 담소하고 있다.

2006년 5월 4일 공권력에 의한 대추리 분교 강제집행 후 세월이 흘러 어느덧 11년이 지났다. 올해는 대추리마을 사람들이 2007년 3월 대추분교 운동장과 도두리 들판에서 고향땅과 작별하는 눈물의 매향제(埋香祭)를 지내고 그리운 고향을 떠난 지 10년째이기도 하다.

강제이주 10년을 맞아 평택시 팽성읍 노와리의 현 대추리평화마을로 이주해 힘겹지만 여전히 당당한 대추리 사람들로 살고 있는 주민들을 만나보았다.

대추리평화마을 역사관

“일본놈들이 쫓겨나가고 미국놈들 들어와서 해방인줄 알았더니 그놈이 그놈이더라...” 대추리 주민들이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을 벌일 때면 으레 확성기를 타고 흘러나왔다는 ‘주한미군 철거가’의 첫 소절이 말해주듯 대추리 사람들이 소중한 삶의 터전을 빼앗긴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동학혁명 중 1894년 일본과 청나라가 충남 성환일대에서 당시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싸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대추리의 질곡의 역사는 시작됐다.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를 쫓아내고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면서 조선을 자신들의 영향권에 두었다. 이어진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은 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평택 팽성읍 안정리 일대에 약 40만여 평의 비행장과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이때 쫓겨난 주민들이 옛 대추리로 이주해 소금기 가득한 갯벌을 간척하여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지으며 힘겹게 살아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일본군을 쫓아낸 후 기지를 유지하고 있던 미군이 확장을 시작하면서 옛 대추리에서 살던 사람들은 지금의 대추리로 쫓겨났다. 두 번의 강제 이주를 경험한 주민들은 낙담하지 않고 새로운 터전을 기름진 땅으로 변모시켰지만 55년이 지난 2007년 그들은 다시 땀 흘려 어렵사리 일구었던 삶의 터전을 등져야했다. 결국 대추리 사람들은 일본군에 쫓기고 미군에 쫓겨 세 번의 강제이주 끝에 지금의 ‘대추리평화마을’에 정착한 것이다. 2007년 정든 고향을 떠나 현재의 대추리 평화마을에 뿌리를 내린 주민들은 44가구 100여명이었다.

농부들이 밭농사를 짓기 위해 이랑 위를 비닐로 덮고 있다.

그 깊은 한이 서려서일까... 대추리마을의 어르신들은 농사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아 좀 더 힘껏 밀어요.”, “힘껏 밀기는 더 힘쓰면 비닐이 다 찢긴다니까...” 마을 입구 옆 밭에서 네 명의 어르신들이 이랑 위에 비닐을 덮는 기계를 밀고 끌며 주고받는 얘기 소리가 들렸다.

이들은 평생 천직으로 생각해 온 농사를 포기할 수 없어 남의 땅을 빌려 참깨 농사를 짓고 있는 이정오(81), 방효필(78), 강권석(77), 홍광유(70) 씨로 평균 나이 일흔 여섯의 농부들이다. 제일 나이가 어린 막내가 일흔이지만 봄 치고는 제법 따가운 햇살과 더위도 이들을 막지는 못했다.

초면에 인사만 나누고 제법 너른 밭을 세 번 오가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앞서 걷는 농부들도 그 뒤를 따라 걷는 사람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바퀴 달린 농기계가 이랑과 고랑 사이를 지날 때마다 기름진 속살을 드러내는 흙과 아련한 흙 내음, 간간히 부는 바람, 밭 주변에 핀 하얀 벚꽃이 수많은 얘기들을 속삭이는 듯 했다.

마을 옆 텃밭에서 가래질 하고 있는 대추리 주민

시원한 음료수를 건네자 별 말 없이 받아들고 시원하게 들이켜며 연신 “좋다”를 연발하던 백발의 농부들은 마치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말들을 쏟아냈다.

“나는 지금이라도 상황을 돌이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대추리 너른 들에서 벼농사를 지으면서 살거야. 힘들어도 그때는 배고픈 사람 없이 살았지...” 말끝을 흐리면서 먼저 운을 뗀 강권석 어르신은 지척에 삶의 터전을 두고 쫓겨난 마을 사람들의 애끓는 마음을 전했다. “차라리 아파트나 공장이 들어섰으면 비록 논과 밭은 없어졌어도 가볼 수라도 있지만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우리 땅을 영영 밟아 볼 수가 없다는 게 더 마음 아프다”고 했다. 땀 흘려 농사 짓던 논을 멀리서라도 보고 싶지만 더 쓰리고 아플까봐 그쪽으로는 가지도 않는 다는 강권석 어르신이 분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깊은 한숨으로 삭히자 방표필 어르신도 한 마디 거들었다.

“대추리 사람들은 대부분 벼농사를 짓고 살았어. 밭농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니까. 너른 들판에서 벼가 자라고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걸 지켜보면 밥을 먹지 않고도 배가 불렀으니까.” 벼농사로 큰돈을 만지지는 못했어도 먹고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말이다. 어르신들은 아무리 나이든 두 내외지만 생활하고 병원이라도 다닐라치면 한 해에 적어도 1500만원에서 2000만원은 있어야 하는데 농사도 지을 수 없고 공공근로도 할 수 없어 살길이 막막하다고 했다.

이곳으로 이주하고 한동안은 시에서 제공하는 공공근로를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했지만 지금은 자식에게 손을 벌리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최대한 적게 쓰고 적게 먹으며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상황은 미군기지 확장을 위한 강제이주를 관철시키기 위해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정부가 이들에게 살 집은 마련해줬지만 살아갈 방법이나 대책은 해결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비롯됐다. “의학기술이 좋아지고 약이 좋아 오래 산다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어르신들의 자조 섞인 말을 들으며 참담한 마음을 안고 돌아섰다.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 번에 걸쳐 삶의 터전을 내어줬던 대추리 사람들은 앞서 상황과 같이 아픔을 딛고 일어서려 한다. 소금기 가득한 갯벌도 옥토로 변모시켰듯이 다시 마을다운 마을을 만들어 내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대추리사람들’이라는 협동조합을 만들었고, 농촌체험휴양마을 사업 등 주민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 찾아가고 있다. 순전히 자신들만의 노력으로 말이다.

상처입고 내몰려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대추리 주민들에게 어김없이 따스한 생기 가득한 봄이 찾아왔다. 메마르고 거친 혹한을 넘어 자연이 허락한 생명과 희망의 계절인 봄이 우리에게 찾아왔듯이 모진 현실이 강제하는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는 대추리 주민들에게도 봄날 같은 일상이 회복될 수 있도록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때이다.

 

문영일 기자  webmaster@pt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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