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성 경<송탄여중 교사>

▲ 김성경<송탄여중 교사>
고속도로. 휴가철에 길눈이 어두워 국도 이용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참 지겨운 낱말이다.

그러나 나처럼 검은 교복으로 6 년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낱말이기도 하다.

두 눈썹 사이에서 시작하여 정확히 정수리를 거쳐 뒷목줄기로 이어지던 바리깡(!)의 파시즘적인 예술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아니 최소한 재수 없는 일로 여기거나 하나의 훈장으로 여겼다.

그러니 손톱이 손가락 끝으로부터 2cm 이상 벗어났다면 인정할 수 있겠는가.

2002년 7월 어느 날. 대개의 학교에서 그렇듯, 방학 중 아이들 생활 태도를 미리 다잡아놓겠다고 용의 검사를 하던 날이었다.

효과가 있던 없던 그건 의미가 없다. 그나마 이제 형식적으로 바뀐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음마? 평소 아이들 겉모습에는 너그러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다. 한 아이 손톱이...

난 아이를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왜 길렀니?”

아이는 주저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방학중에 서울에서 코스프레 축제(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대중 스타나 만화 주인공과 똑같이 분장하거나 나름대로의 캐릭터를 꾸미고 즐기는 축제)가 있는데 그 때 제가 생각하는 캐릭터를 연출하려면 긴 손톱이 필요해서요.”

“가짜 손톱도 있던데...”

“그것보다는 진짜 손톱으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좋거든요.”

개미 만한 아이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 그럼, 너 축제 끝나면 깎아야 한다.”

그 아이는 온 종일 만화와 씨름하는 아이였다. 착한 아이였다.

이런 딸에 대해 이해해 줄 생각이 없는 아버지와 무서운 아버지로부터 무작정 딸을 보호하려는 어머니를 둔 아이였다.

물론 아이는 아버지 모르게 손톱을 기르느라 오랜 시간 맘을 졸이며 지내야 했다.

된장찌개를 먹기 위해 숟가락을 내민 아이의 손 모양을 상상해 보라.

2003년 같은 시기. 다른 아이.

“왜 길렀니?”

“깜박 잊고 안 깎았어요.”

치장에 무딘 내 눈에도 아이 손톱은 정성껏 다듬어져 있었고 색깔 없는 메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아이와 손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이 여러 번. 그 때마다 깜박했단다.

착한 아이였다. 나는 아이를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손톱깎이를 내밀었다.

“여기서 깍고 가라.”

이 아이는 치장을 좋아한다. 그런데 최소한 내게는 그냥 치장으로만 보였다.

선생 노릇을 하다보면 늘 깊숙한 곳으로부터 뒤엉켜 부담으로 안고 사는 두 단어가 있다. “평등”과 “형평”이다. 대개의 아이들은 일관되게 “평등”을 요구한다.

하지만 선생은 결코 “평등”하게 아이들을 대할 수 없다. 다른 것을, 그래서 덜어내는 법을 가르치고 채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아이들은 이해해주려나?

아이의 부모님들은 이해해 주시려나?

처가를 다녀오다 좀 더 빨리 갈 수 있을까 싶어 고속도로를 선택했다가 낭패를 보고는, 억울한 맘에 가슴을 쓸어 내리다 보니 두 아이가 생각나 피식 웃었다. 국도도 막힐까?

<교단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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