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살고 싶다”

도장은 우리 삶에서 자신임을 증명하고 확약하는 중요한 순간순간 마다 늘 함께한다. 요즘 들어 그 쓰임이 줄기는 했지만 사회생활의 첫 출발을 위한 이력서, 사랑하는 가족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주택구입이나 임차, 결혼 등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 곁에서 이름 석 자를 깊이 품고 함께 한다.
그만큼 누군가의 이름을 도장 속에 새겨 넣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직장인 KT에서 평택지사로 발령을 받고 1983년 평택에 온 허영무(59) 대표는 올해로 33년 이라는 시간이 흘러 이제는 “평택이 제2의 고향이 아니라 제1의 고향이다”라고 말했다.
3교대로 근무를 하는 근무환경 덕에 20여 년 전 ‘공익사’라는 이름으로 도장가게를 열었다는 허 대표는 공익(公益)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 왔다.
틈틈이 취득한 자격증이 10여개 정도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어렵게 취득한 자격증이 바로 국가공인 인장기능사 자격증이라는 허 대표는 “공익사라는 이름은 나의 이익보다는 더불어 같이 사는 이웃들이 이롭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다”고 설명했다.
예전에는 우리 주변에서 손도장을 파는 곳을 종종 볼 수 있었지만 현재는 컴퓨터가 사람의 손을 대신해 쉽게 볼 수가 없다. 허 대표가 처음 도장을 시작했을 때는 손도장을 어깨 너머로 배워 도장을 새겼는데 평생을 곁에 두고 써야 하는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허투루 만들 수 없어 당시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손도장 명인을 찾아가 3년간 서울과 평택을 오가며 배웠다고 한다.
“서각은 나무에 글을 새기고 전각은 돌이나 나무에 글을 새긴다. 도장도 다양한 재질에 사람의 이름이나 단체명을 새겨 넣는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더 작은 공간에 글을 새겨 넣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 종류도 다양해 예로부터 사람마다 자신의 기운에 맞는 상아나 나무, 돌, 금속 등의 소재에 이름을 새겨 넣으면 길(吉)하게 된다고 전해져 왔다”며 “실제 효험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허 대표는 공익사를 찾은 고객들이 “이력서에 찍은 도장 덕에 취직이 되었다”거나 “생애 첫 집을 장만했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는 등의 인사를 해올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도장 때문에 합격하고 취직한 것은 아니겠지만 고객들에게 좋은 기운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믿고 그들에게 힘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냐는 말을 하는 그의 입가에 웃음이 묻어났다.
그가 가장 안타까운 일로 꼽은 것은 지난 2005년경 오랜 시간동안 축적해 놓은 도장 관련 자료들을 화재로 잃은 일이다. 도장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전파되었는데 요즘은 도리어 일본에 가야 손도장과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일제강점 시절에 서각·전각·도장과 관련된 자료들을 약탈해간 탓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사회적인 인식 차이로 뛰어난 손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명인들이 전수자를 찾지 못해 맥이 끊어지는 반면 일본은 가업으로 이어지는 장인정신이 있어 숙련된 기술들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하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하면서 스스로에게 몇 가지 약속을 했었다는 허 대표는 “첫째, 여유롭게 살자. 둘째, 느릿느릿 살아보자. 셋째,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보자고 다짐했지만 아직도 숙제로 남아있다”며 “자신과의 약속이자 이웃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내가 이웃 안에서 이웃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살아가야 하나 늘 고민하겠다”며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무조건 좋은 대학에 가서 직장에 취직하고 돈을 많이 버는 걸 인생의 목표로 삶고 있는데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하고 더불어 사는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갖고 살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기회가 된다면 서울과 오산시처럼 시민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글씨체로 평택시의 직인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희망을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