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이야기 - 팽성읍 안정리

안정리 문화·역사 기댈곳은 ‘농성’이지만 축성시기는 미스터리
■ 미군기지와 기지촌 사람들
안정리는 “외국군의 주둔과 영향”이라는 주제를 생각할 수 있는 역사적 현장이다.
일제 말 일본군 보급대 비행장이 건설되면서 시작된 외국군 주둔의 역사는 해방 후 미군의 주둔으로 이어졌다.
특히 6. 25 전쟁을 계기로 한반도 안보의 절대적 존재가 된 미군은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그랬던 것처럼 전시작전권 뿐 아니라 우리 영토 어디든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승만 정권은 그것만이 은혜에 대한 보답이며 우리의 살길이라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미군 주둔을 위해 자기나라의 국민들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밖으로 내몰았다.
미군기지는 토착민들에게는 재앙이었지만 전쟁 피난민이나 가난한 민중들에게는 희망의 땅이었다.
이들은 미군기지를 배경으로 배운 사람들은 통역관이나 사무관으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노무자나 용역회사의 잡역부로 자리잡았다.
부대주변에는 미군을 상대로 장사하고 술을 파는 사람들과 몸을 파는 위안부들이 몰려들었다.
위안부들은 양색시 또는 양공주로 불렸다. 1960년대 초에는 파주, 동두천, 연천 등에 있던 미군부대가 감축되면서 그 지역 위안부들까지 몰려들어 한 때 안정리에는 1700명이 넘는 양색시들이 드글거렸다.
급격한 인구증가는 심한 주택난을 가져왔다. 방세가 쌀 한 말에 180원 할 때 800원에 달했는데도 집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나 토착민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집을 지어 방을 놓았다.
하지만 모양만 집이고 방이었지 미로 사이로 다닥다닥 지은 개미집이었다.
내가 우리나라 영화에서 몇 안되는 좋은 영화로 기억하는 안정효 원작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와 같은 풍경이 안정리의 1950, 60년대였다.
■ 길마재가 어디예요?
안정리는 12개의 마을로 나눠져 있다.
12개 마을에서 토박이 마을은 안정 1리 안현(鞍峴) 뿐이다. 안현말고도 부대 안에 서정자라는 마을과 일곱집매가 있었지만 일제 말과 해방 후 비행장이 건설되면서 강제이주당하였다.
안현(鞍峴)의 우리말 땅이름은 ‘길마재’다. 길마재는 서정주의 시집에서처럼 ‘질마재’로도 불린다.
길마란 “짐을 싣기 위해 소나 말 등에 얻는 도구”를 말한다. 그러므로 길마재란 “길마처럼 생긴 고개”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안현(鞍峴)은 길마재의 한자표기이다. 안정리라는 지명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안현의 안(鞍)자와 서정자의 정(亭)자를 합성하여 만든 이름이다.
안정리는 주민들 대부분이 외부에서 유입된 인구이고 마을이 하도 많다보니 마을 사이의 경계가 어디인지, 어떤 사람들이 거주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마을에서 토착민을 만난다는 것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렵다.
부대 주변에서 가장 고령자라는 박용채(94세) 옹도 6.25전쟁 후 직산에서 이주한 분이었고, 어렵사리 만난 최영진(74세) 옹이나 박화일(75세) 옹도 5, 60년대에 외지에서 이거(移居)한 분들이다.
토착민 윤병한(80세) 옹을 만난 것은 안정6리 노인정에서였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덥썩 잡았지만 불행하게도 윤 옹은 얼큰하게 취해있어 인터뷰가 불가능했다.
노인정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얻은 것은 5, 60년대 기지촌 형성과정과 길마재 마을이 안정1리 아니면 2리일 것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노인정을 나와 부대 신 정문 앞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수소문하였다. “저 길마재 마을이 어딘줄 아세요?”. “길마재요, 처음 듣는데, 안정리에 그런 마을이 있어요?. 저기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슈퍼 주인에게 물어보세요, 그 분이 이곳에 오래 살았어요”.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봐도, 가게문이 닳도록 돌아다녔어도 아는 사람은 고사하고 관심 갖고 대답하는 사람조차 만날 수 없다.
터벅터벅 헤밀턴 호텔 앞을 지나 초원연립 부근에서 다리 쉼을 하는데 건너편 버스정류장 이름이 낮 익다.
눈을 비비고 자세히 봤더니 내가 그렇게 찾고 헤메던 “안현(鞍峴=길마재)”이다.
■ 서정자 마을과 일곱집매
길마재 마을은 안정주공아파트 뒤에 숨어있었다.
야트막한 능선이 살풋 마을을 감싸 안은 모양이 삼태기 형국인 평택시 청룡동을 보는 듯하다.
마을의 집들과 골목은 현대판 개발논리에서 비켜난 듯 옛 모습 그대로다. 반가운 마음에 골목을 휘젓고 다니다 노인정을 찾았다.
같은 안정리인데도 길마재 노인정은 안정6리 노인정에 비하면 하꼬방 수준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든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라는 말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건 너무하다 싶다.
서 너명 노인들도 세련미를 발산하는 안정6리 노인들보다 경계심도 많고 초라했다.
그럼에도 마을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은 컸다. 질마재 마을은 약40호 정도 된다.
아직도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아서 골목에는 군데군데 흙 뭍은 농기구들이 있다.
예전에는 주변에 마을도 많지 않아서 경작지도 넓은 편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대부분 소작농이었고 해방 후 농지개혁으로 먹고 살만해졌다는 스토리는 인근의 송화리나 대사리와 다를 바 없다.
서정자 마을은 본래 구 정문 안쪽에 있던 마을이다. 팽성지(18세기 초)에 따르면 본래 이 마을에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쉬어갔던 “서정자”라는 누정(樓亭)이 있었다.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라는 내용이다.
중국 가는 사신이 서정자 마을을 지났다면 시기적으로 삼국시대 말이거나 통일신라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중국으로 가는 교통로는 화성군 서신면의 당항성이 대표적인데,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이곳까지 가는 최단거리는 청주, 천안에서 서정자마을을 지나 대추리 곤지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는 길이었다.
이 같은 기록으로 볼 때 이 마을의 역사는 1천년을 훨씬 상회한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도 일본군과 미군의 주둔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기지건설이 시작되면서 마을사람들은 농토와 가까운 송화리나 길마재, 일곱집매로 이주하였다.
일곱집매는 서정자 마을 바깥쪽에 있던 마을이다. “매”라는 지명은 “말” 또는 “마을”과 같은 의미로, 일곱집매는 “일곱 집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은 본래 3형제가 “세집매”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3형제가 떠나고 난 뒤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일곱집매가 되었고, 일제 말 강제 이주 당한 서정자 마을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30여 호의 큰 마을이 되었다.
하지만 이 마을마저 6.25전쟁 후 미군부대가 확장되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마을이 떠난 자리에 미군 병사들의 막사와 전쟁무기들이 터를 잡았다.
■ 정태춘과 김민기 그리고 안정리
안정리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은 농성(農城)이다.
안정리 농성은 둘레가 305미터에 불과 할만큼 규모가 작고, 축성(築城) 시기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 성곽이다.
1998년 수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정밀조사를 하였지만 시기와 주체를 확인하는데 실패하였다. 미스터리의 세계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래서 혹자는 신라 말 중국에서 안정리 부근으로 이주한 평택 임씨의 시조 임팔급이 쌓았다는 주장을 했고,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하면서 군량미를 쌓아두기 위해 축성했다고 추정하였다.
명칭도 농성(農城), 왜성 등 다양하게 불렸다. 나말여초의 혼란기에 지방 호족들이 소규모 성곽을 축성한 사실은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되는 사실이고, 임진왜란 때 평택현에 왜군이 머물며 분탕질을 하였던 사실이 있었으니 위의 주장은 나름대로 근거를 갖고 있다.
축성문제와 함께 조선시대 이곳이 성산(城山)이라고 불리면서 성안에 성황사를 두었고, 평택고을의 “진산”으로 받들어졌다는 사실도 중요한 내용이다.
알다시피 객사리 북쪽에는 부용산이 있기 때문에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2㎞ 밖의 농성(성산)을 진산으로 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종일 김메기를 마치고 석양을 등지며 돌아오는 농부의 마음 같다.
내친 김에 원정리와 내리, 대추리를 거쳐 앞으로 미군기지에 수용될지 모를 흑무개들과 도두리들을 지난다. 넓은 들녘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크고 붉다.
도두리들은 가수 정태춘의 고향이다. 그는 이 들판과 아산만의 바닷바람을 먹고 자랐다.
그래서 그의 노래에서는 흙냄새와 갯냄새가 난다.
하지만 안정리는 다르다. 이국적이고 화려한 듯하지만 조금은 절망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는 희망을 찾아 왔지만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 새 희망을 담아 부르는 김민기 노래가 적절하다.
<지명이야기>
평택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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