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지리적 장점 활용하여 세계 문화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어”

찬바람에도 귀 기울이는
      여유 있는 삶을 찾아야

평택시내에서 포승읍 내기초등학교를 지나 평택항 쪽으로 달리다 왼쪽을 보면 ‘호랑이배꼽’ 간판이 보인다. 간판을 따라 들어간 마을은 숲이라 하기엔 초라하지만, 산토끼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나지막한 언덕으로 시작한다. 단숨에 언덕을 오르면 호랑이 형상 조형물이 찾아오는 이에게 마치 담뱃대를 내려놓고 껄껄대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늘 위에서 흔들거리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평택시민신문이 창간 19주년을 맞아 ‘지방자치와 평택예술’에 대해 이야기할 오랜 독자이자, 문화인으로 택한 이계송 평택(통합)예총 초대지부장(1996~1999)이 사는 희곡리 입구 모습이다. 댓골이라 불리던 마을엔 이계송 화백이 자신의 생가에 차린 전통음식점 호랑이 배꼽과 댓골재 양조장, 발효 문화 학교, 이계송 화백 작업실 등이 함께 있다. 이 화백을 찾아간 날, 모처럼 내린 가을비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가을을 차분하게 깔아놓고 미국의 국민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의 ‘가지 않은 길’에서 그렸듯이 어느 쪽 길로 갈지를 묻고 있었다. 호랑이 조형물 아래 주차하고 단정하게 깔린 보도블록을 마다하고, 가을비에 고개 숙인 구절초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 촉촉하게 젖은 풀잎을 밝으며 언덕을 내려갔다.

<평택 국제아트페스티벌>
창립과 지역예술인의 힘 모으기

1996년 귀향과 더불어 시작된 지역예술계와의 조우는 당시 막 걸음마를 시작하던 지방자치와 자연스레 인연을 맺게 했다. (구)평택군, 송탄시, (구)평택시가 통합하여 평택시로 다시 시작할 때 예총 평택지부도 통합해야 했지만, 여기저기서 불협화음이 터져 나오면서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통합 과정에서 역할을 분담하고, 조정자 역할에 머물기 원했던 이 화백은 떠밀리듯 (통합)평택예총 초대 지부장을 맡았지만, 지방자치단체가 지향해야 할 지역예술의 역할에 대해 4년 동안 누구보다 멋진 역할을 해냈다.

이 화백은 통합 예총 지부장직을 시작할 때, 평택만큼은 다른 지자체가 부러워할만한 모범을 보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통합예총 법인 등록과 문예회관 내에 예총사무실 확보 등과 함께 지부장직을 시작한 이 화백은 지방자치단체의 예술 정책을 견인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방자치제 시행과 함께 활성화될 것을 기대했던 지역예술이 중앙 정치의 장점은 마다하고 문제점만이 그대로 전이되는 것 같아 이 화백을 안타깝게 했다. 그래도 평택예술계가 평택의 미래, 문화를 만들어가는 불쏘시개가 됐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남들이 불가능할 거라고 코웃음 치던 일들을 묵묵히 해 나갔다.

1996년 이 화백은 평택 문화예술이 가진 잠재 에너지를 세계화하겠다는 큰 염원을 갖고 ‘국제아트페스티벌’을 창립했다. 당시 예총 1년 예산이 8000만 원 밖에 하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국제아트페스티벌은 어렵사리 문예진흥원의 후원으로 우여곡절 끝에 열었다. 당시 문예진흥원장이 “평택에 뭐가 있어서 국제적인 행사를 하려 하느냐. 경주처럼 문화 콘텐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광역시처럼 인구가 많은 것도 아닌데 가능하겠느냐”며 지원을 꺼리자   “빈 땅에 건물 짓는 게 쉽겠는가? 헌 건물 있는 건축물을 헐고 그곳에 건축하는 게 쉽겠는가? 평택이 비록 지금은 척박한 환경이지만 가능성은 무한하다며 지방자치시대에 꼭 필요한 지자체만이 할 수 있는 문화예술 활동의 모델을 제시하겠다”며 문덕수 전(前)문예진흥원장을 설득했다. 적은 예산이었지만 지역 예술인들이 지역 문화예술이 가진 장점을 지방자치시대에 제시하겠다는 비전과 평택시민의  열린 마음과 주인의식으로 시작한 것이 동방의 등불 국제아트페스티벌이다.

이 화백은 1988년도 서울올림픽 당시 동구권 작가전을 진행했던 인연으로 로스엔젤레스(LA) 코스모폴리탄 예술협회(Cosmopolitan Art Association) 한국대표를 맡게 되었는데, 그 당시 인맥들과 함께 국제아트페스티벌을 창립하였다. 당시 미술작가들이 주축이었지만, 전시회(Exhibition)라 하지 않고 페스티벌(Festival)이라고 한 이유는, 한국의 문화와 산업 전반에 걸친 행사로 예술의 사회공헌 의미를 살리고 상생의 의미로 음식과 춤, 공연 등을 시민과 ‘같이’ 나누는 공간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화백은 “평택은 천재지변이 없고 너른 들이 있어 예로부터 인심 좋은 동네다. 신라, 백제, 고구려가 경영하며 어울려 살던 땅으로 문화적으로 비옥한 환경을 만들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췄다”고 말한다. 세계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평택항을 끼고 있고, 수도권과 충청권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있기 때문에 지자체는 그런 장점을 살려서 세계 문화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정책을 입안하고 지원하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국제아트페스티벌이 평택에서만 아니라  인도. 태국, 일본, 아르메니아, 멕시코, 독일, 프랑스 등 28개국 각 나라별 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이 화백은 창간 19주년을 맞은 평택시민신문이 그동안 지역사회에서 지역 이야기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문화기획자 역할을 해 온 것을 높게 평가했다. “지역 언론은 아주 작은 걸 현미경으로 살펴서 시민이 크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며 지역신문을 궁금해 하고, 지역뉴스를 많이 소비하면 지역문화가 살아나게 돼 있다는 그의 지적은 분명 타당하다.  긍정의 눈으로 시정되어야 할 것을 살피면서 대한민국에 지역 예술 발전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도시가 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희망은 언제나 긍정에서 시작한다.

최선 다한다고 삶이 아름다울까…?
예술은 여유 찾자는 것

자치단체는 문화예산은 낭비라는 생각을 벗어던져야 한다며 조곤조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나갔다. 그가 말하는 문화는 아름다운 소비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를 맹신하며, 최선을 다할 것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최선 다한다고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을지를 아무도 묻지 않는다. 이 화백은 “최선 다한다면 일은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은 다른 문제다. 우리는 이 땅에 성공하기 위해 왔는지, 아름답게 살기 위해 왔는지 되새겨 봐야 한다.”며 예술이 그 질문에 답을 해 주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찬바람에도 귀 기울이는 ‘여유’를 위해 예술 한다고 하는데, 정작 예술가들조차 삶을 아름답게 하는 여유를 잃어버렸다는 그의 지적은 바쁘게 살기를 강요하는 이 시대가 귀담아들을만하다. “화가가 붓을 붙잡고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게 자연스럽게 들리는 사회는 성공한 작가만을 추켜세운다. 그러나 그 인생이 행복한 삶이었는지 누군가는 물어봐야 한다.” 죽는 순간까지 붓을 쥐어야 하는 예술에선 여유를 찾을 수 없다. 숨 가쁘지 않는 여유로운 삶을 찾는 게 예술인데, 여유가 빠져 버린 이율배반적인 예술가의 삶을 소망해서야 쓰겠는가 하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행복한 삶은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체득 발견하고 머물게 하는 일이라 한다. 이 화백은 저렴한 짜장면을 먹다가 값비싼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것이 과연 행복이고 복지일까 반문한다. 예술은 좋은 밥상을 꿈꾸는 일이 아니라 행복한 밥상을 맞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일생이 일대사라 한다며 하나가 가지는 의미를 되새겨 보라한다
 
더불어 상생하는 삶이 예술이라 한다
화가는 미술이라는 예술의 한 장르에 살 뿐이다
더불어 사는 행복한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예술 행위이다
행복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인류는  물질문명의 발달을 지표로 삼았다
조건을 위해 노력해왔다. 행복한 삶을 외면한 채로

난세에 영웅호걸이 난다 한다
덕을 갖춘 평택시의 지도자가 필요하다
덕은 지혜로운 사람의 몫이다
잘나고 많이 배운 지식인도 필요하다
그러나 작은 기쁨에도 같이 웃고 큰 슬픔에도 같이 아파하는  이웃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시민의식이 예술가여야 한다
행복이 진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민의식은 진정한 예술인의 마음일 때 자랑스러운 평택을 말할 수 있다

오방색이 전하는 염원, 언제나 그 빛이소서

아직도 빈 캠퍼스는 자신을 당황하게도 하고, 가슴 떨리는 설렘을 안겨주기도 한다는 이 화백은 본지 창간 19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고유의 전통색깔인 오방색(五方色)에 담은 염원을 털어놓았다. 오방색은  빛의 표현이라 한다.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의 밝고 맑고 깊은 맛이 우러나는 다섯 가지 색을 빛으로 환원하는 작품은 ‘언제나 그 빛이소서’로 2008년도 작품이다.

이 화백의 작품은 붓의 강한 움직임과 색감의 강렬함으로 인해 시원하면서도 원초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고, 색깔과 색깔이 부딪히고 겹치면서 무언가 넘쳐나는 듯한 여운을 남긴다.  그 중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빨간색이 도드라진 ‘언제나 그 빛이소서’를 앞에 두고 지방자치와 지역문화 활성화를 염원하는 그의 속내를 들어보았다
“예술은 자기가 모르고 있는 자기 속에 내재되어있는 자아를 찾는 작업이다. 공감을 바라고 그것을 체득하고, 알아가고, 감동으로 가는 길이 예술 작업이다. 따라서 공감을 말하는 것은 오히려 허전할 수 있다. 공감은 침묵으로 답한다.”

예술을 그저 눈요깃거리, 이야깃거리로 삼는 바람직하지 않은 문화적 풍토에선 ‘여백’을 찾기 힘들다. 여백을 갖지 않으면 삶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만이 남는 싸움터일 뿐이다. 삶의 현장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 화백의 예술론은 마치 도인의 선문답 같기도 하지만, ‘빨리빨리’를 외치며 살아온 현대인들에게는 오아시스 의 단물일 수 있다.

“뙤약볕 아래서 땀 흘리는 농부의 모습에 눈물 나도록 아름답다고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게 예술이다. 그걸 고통스럽다고 하면 예술은 그 고통을 보람으로 바꿀 수 있는 여백을 준다.”
주어져 있는 인생을 어떻게 스스로 경영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그림 그리는 삶이 행복하다는 이 화백은 현미쌀을 발아시켜 천연 막걸리를 만든다. 먼 훗날  술 익는 마을에서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한 한 예술가가 모든 것을 바꿔놓은 것을 보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19주년을 맞은 평택시민신문이 앞으로 어떻게 역사 속에 자리 매김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숙제처럼 말이다.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 두 갈래로 길이 나 있었습니다.
두 길 다 가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한동안 나그네로 서서
한쪽 깊이 굽어 꺾여 내려한 곳으로
눈이 닿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 중략 -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 법.
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말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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