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책 읽기 부안여행기

여행의 미덕은 예기치 못한 만남에 있다. 하지만 누구와 함께인가에 따라 만남을 처리하는 태도는 사뭇 달라진다. 지난 8월 13일, 평택시 한 책 읽기 운영위원들과 함께 부안연수를 다녀왔다. 명목상 연수지만 실상은 MT를 겸한 것이었다.

평택시청에서 제공한 버스는 가깝다고 생각한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를 버리고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렸다. 서해안고속도로 평택-서천 구간은 나의 고향 가는 길이다. 어디에 휴게소가 있고 어느 곳에 속도위반 카메라가 도사리고 있는지 알고 있는 길. 동행한 김기수 대표와 고향근처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조정묵 대표가 서천에 대한 안내를 부탁한다. 서천은 내 고향임에 분명하지만 연구지역은 아니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그래도 아는 대로 말해보란다. 장항선의 종착역 장항과 한산모시의 고향 한산, 저산 팔읍의 고장 비인 그리고 나의 고향 동백정과 홍원항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금강하구둑을 건너면서는 군산과 만경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란다. 조용히 다녀오겠다는 애초의 다짐과는 환경이 달라졌지만 또 주절주절 일제침략과 군산의 역사, 역사적 수탈의 장소 호남평야, 간척의 역사와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 풀었다.

오전일정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부안에너지마을은 새만금간척지 안에 있었다. 정부는 새만금사업에 대한 주민반대여론을 무마하려고 여러 가지 지역사업을 공약하였고, 지역사업에 지역주민들을 고용하겠다고 약속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일 뿐, 정부가 교체되면서 약속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고 에너지마을만 건설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신재생에너지를 테마로 조성한 일종의 대안에너지박물관이었다. 안내자는 다양한 컨셉의 신재생에너지, 대안에너지를 소개하였다. 어떤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지만 풍력이나 조력발전, 태양광을 활용한 에너지 만들기 프로젝트는 평택지역에서도 적용 가능한 사업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오후일정은 내소사 답사다. 변산과 내소사는 내가 즐겨 찾는 답사처다. 쌀쌀한 늦가을이나 잔설 내린 겨울 초입에 답사를 하면 환상적인 전나무숲길과 변산을 배경으로 한 내소사 당우들의 정갈하고 당당함은 언제 찾아와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번에 찾은 내소사는 정갈함보다 번잡함이 느껴졌다. 자본에 물든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온전한 것이 몇 안 되지만 내소사의 변화는 변심한 애인만큼이나 서운했다.
일행을 내소사 봉래루 그늘에 앉혀두고 답사안내를 시작했다. 정갈한 전통사찰에 봉래루라. 참으로 현판을 달은 저의가 궁금했지만 시간에 쫓겨 의문을 접었다. 나는 사실 내소사 답사준비를 조금 해둔 상태였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입 다물고 뒤에서 쫓아다니겠노라고 다짐했지만 ‘선생님의 명품 가이드를 기대한다’는 이경희 선생님의 말 한 마디에 조금은 준비해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소사에서 내가 이야기한 것은 네 가지다. 첫째는 내소사에 대하여, 둘째는 부안과 반계 유형원에 대하여, 셋째는 매창에 대하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자 지운 김철수에 대한 것이었다. 내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사람, 개혁, 통일이었다. 분단의 틀 안에서 규정지어진 우리의 의식을 벗겨내고 통일지향적인 화해와 상생의 가치관을 되찾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나의 안내가 괜찮았던지 답사자들은 감동의 멘트로 화답했다. 가이드는 이럴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내소사 답사 뒤 시간이 조금 남아 한 곳을 더 답사하기로 했다. 어디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여름철이라는 특성을 살려 내소사 근처 모항해수욕장에 가자고 제안했다. 변산에서도 모항은 특별한 곳이다. 사실 아주 작은 해변이고 격포나 곰소, 줄포에 비해 덜 알려진 곳이어서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하다보면 스쳐 지나치기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모항으로 가는 길에 시인이며 대학에서 강의하는 유정이 선생님이 안도현의 ‘모항 가는 길’이라는 시를 낭송했다. 그러고 보면 경상도 출신이지만 익산 원광대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북도에서 교사를 한 안도현은 군산이나 변산에 관한 시를 많이 썼다. 나도 진즉부터 읽었던 시였던지라 싯구가 귀에 쏙쏙 들어왔는데, 차창 밖의 풍경이 시와 잘 어우러져서 감동이 배가된다. 모항은 최근의 개발로 예전의 호젓함이 많이 퇴색했지만 소박하고 정갈한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산들바람이 부는 해변에서 우리 일행은 이번 여름 미처 보내지 못한 바다를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 곰소항과 곰소염전이 지난다. 줄포 일대의 간척으로 염전의 역사가 시작된 곰소는 천일염의 보고다. 나는 개인적으로 5, 6년 전 추석 명절에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부안과 곰소를 여행했다. 부안은 아버지의 고향이다. 구한말 의병투쟁에 나섰다가 일경에 쫓긴 할아버지가 전라도 일대를 떠돌다 함평에서 할머니를 만나 부안에서 아버지를 낳았기 때문이다. 당시 아버지는 희미하지만 어린시절 생활했던 마을이며 골목길, 이웃사람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는 몸져누웠고 5년 넘게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돌아오는 길 내려올 때 보던 영화를 마저 보다가 잠이 들었다. 전화벨 소리에 깨어보니 버스가 공주를 지난다. 그리고 다시 깊은 잠, 평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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