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회 스승의 날 기념 인터뷰

평택 기술인재 양성 위해 걸어온 ‘38년 외길인생’

지역과 국가발전 위해 우수한 전문인력 키울 것

▲ 동일공업고등학교 김연재 교장(왼쪽에서 세번째)과 학생들

“아직도 그 날의 모습이 눈에 선해요. 학교 주변의 고구마 밭, 벌통, 배나무들... 지금 모습하고 그 때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죠.” 
1977년 10월, 개교를 준비 중이던  평택공업고등학교에 발령을 받고 출근한 첫 날. 황무지에 덩그러니 세워진 학교를 보고 한참을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는 김연재 교장은 그날 어렵게 구한 자취방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고 한다.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내가 선택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 남기로 결심했었지요.”
그 선택 이후 동일공업고등학교와 38년을 함께해 온 김 교장은 말 그대로 동일고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교장은 온 나라가 가난했던 시절, 청소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설립했던 김덕윤 초대 이사장이 생전에 들려주었던 말이 지난 38년간 교사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첫 대면한 자리에서 ‘나라와 개인이 가난을 벗어나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 잘 살 수 있는 마음과 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죠. 시간이 흘러 외부환경의 변화는 있었지만 근본적인 의미는 그 때나 지금이나 같다고 생각합니다.”

개교 당시만 해도 평택에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곳이 많았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든 시절이었던 터라 “해가 빨리 지는 겨울철이면 암흑세상이 되버려 손전등 없이는 집에도 갈수 없었어요. 다들 어려운 시기를 보냈던 거죠.” 김 교장은 어려웠던 만큼 더 열심히 노력했던 제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며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형편이 어려운 여학생들과 자취방에서 함께 지내기도 하고, 단추가 떨어지거나 옷이 찢어지면 일일이 바느질을 해서 교복을 입혔던 제자들이 이제는 어느덧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돼버렸으니 세월 참 빠르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고 말하는 중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답하는 정겨운 대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는 김 교장의 얼굴에 절로 웃음이 묻어난다. “아이고 이 친구가 자기 얘기하는 줄 아는구먼... 제자인데 동문회장을 맡고 있어요. 잊지 않고 전화하고 찾아오는 제자들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지요.” 김 교장은 이런 맛에 교사를 하는 게 아니겠냐는 말을 하며 웃는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진로와 학업에 고민하다 자칫 더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김 교장은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학생들에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늘 강조하죠. 정직과 배려가 실종된 현실이 안타까워요”라고 말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하며 산다면 어떤 일을 해도 잘 적응하며 살 수 있지 않겠냐는 설명이다.

“지금은 능력중심 사회이기 때문에 사회가 원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김 교장은 너무 이른 시기부터 학업과 진로문제로 고민해야 하는 청소년들의 현실이 기성세대이자 교육자로서 안타깝다고 한다. “현실이라는 높은 벽을 마주하고 있는 학생들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조언해주고 지도해주는 게 교사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학생들이 스스로 행복한 삶을 디자인하고 미래의 글로벌 리더, 최고의 기술인재로 당당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힘이 돼주고 싶어요”
인터뷰 하며 전해들은 제자들과 학생들의 이야기를 통해 강산이 족히 4번은 바뀌었을 38년의 긴 세월 동안 ‘학생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할까?’를 고민하며 교단을 지켜왔을 김재연 교장의 지치지 않는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숙소와 양식을 내어주고 어려운 가정사를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온 그의 삶에서 참 스승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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