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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땅 바다…민중문화 꽃피운 평택의 옛 고을 팽성객사리는 평택현 읍치, 조선시대 객사 향교 지금도
평택시민신문 | 승인 2000.07.15 00:00

[평택시민신문]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3

김해규(한광여고 교사)

조선에서 가장 작은 고을


조선시대에 평택현 하면 충청도의 북쪽 가장 작은 현이라는 이미지였다. 작은 이미지만큼 이 고을은 바다가 인접하고 기후와 토지가 척박하여 사람살기에 어려운 고장이었다. 그래서 사족(士族)문화 보다는 척박한 땅과 바다에 기대어 사는 민중문화가 발달한 고장이었다.
역사적으로 평택현은 백제 때 아술현(아산)에 속하였다가 나중에 독립하여 하팔현이라고 불렸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편재하면서 팽성현이라는 군(郡), 현(縣) 이름을 처음 사용하였고 청주를 소경(小京)으로 하는 한산주에 편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평택현(平澤縣)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을 8도 350여 개 내외의 군, 현으로 편재하면서 충청도에 속하였다. 그 후 연산군 때(1505) 잠시 경기도로 이속하였다가, 중종 때(1506) 다시 충청도로 이속하였고, 임진왜란 중에는(1596) 왜군을 방어하지 못해 폐현이 되었으나 광해군 때(1610) 회복되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평택현은 호수(戶數)179호에 인구 704명, 토지가 2,234결이었는데 기름지고 메마른 땅이 반반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1,524호에 인구 5,742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럼에도 이 수치는 전국 350여 개 현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우박, 가뭄, 해일 등 자연재해가 많았다는 기록과 함께, 평택현으로 유배를 보냈다는 기록이 자주 눈에 띈다. 또 궁벽지고 작은 현이어서 수령들도 가려서 보냈고, 명을 받은 수령들이 부임을 꺼렸으며, 부임한 수령들의 탐학이 심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지역의 삶의 조건은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들이었다.

옛 고을의 정취- 객사리

객사리는 평택현의 읍치(邑治)였다. 어떤 사람들은 객사리란 지명이 6.25사변 때 사람들이객사(客死)를 많이 해서 생겨났다고 그럴듯하게 주장하지만, 객사리란 지명은 본래 평택현 객사(客舍)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객사란 객관(客官)이라고도 하는데,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지방관의 망배례를 받는 곳이면서, 국가의 공적인 일로 여행하는 관리들을 대접하고 묵게 하는 집이었다.
읍치(邑治)에는 동헌과 향교, 객사, 창고 등 공해(公 )와 교육기관 그리고 부속시설이 있어야 한다. 동헌(東軒-내아(內衙)를 포함하여) 자리는 지금의 부용초등학교 터로 생각된다. 이 곳이 향교와 객사의 중간이고, 일제가 각 지방에 공립학교를 설립하면서 공해(公 )시설을 학교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 객사리에서 볼 수 있는 조선시대 건물은 객사(客舍)와 향교(鄕校)이다. 향교는 중건 시기가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명륜당, 동, 서재, 대성전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다. 평택 향교가 제 모습을 간직하게 된 것은 일제가 유림들을 지배하에 두기 위하여 향교장의회(鄕校掌議會)를 조직하면서 향교를 존속시켰기 때문이다. 평택 객사(客舍)는 일제시대부터 양조장으로 사용하다가 최근 중수되었다. 일제하에서 양조장은 지역 유지층이 운영하였는데, 평택 객사도 일제와 결탁한 유지층에 의해 양조장으로 변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고 지방관들의 망배례(望拜禮)를 받았던 객사의 운명치고는 가련하다 아니할 수 없다.
팽성읍은 평야지대여서 큰산이 없다. 제법 높은 산이래야 부용산과 남산정도이다. 북쪽으로 안성천이 휘감아 돌고, 주변으로 너른 평야가 펼쳐진 팽성읍에서 해발 45m밖에 안되는 부용산은 제법 높아 보인다. 1899년에 편찬된 팽성읍지에 보면 평택현의 주산은 객사리에서 1km 떨어진 안정리의 성산(城山)이라고 기록되었으나, 동헌을 중심으로 볼 때 부용산을 주산으로 해야 옳다. 부용산은 주변 경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산이어서 이곳에는 관가정이라는 누정(樓亭)이 있었다. 그래서 부용산 아래 두리 쪽 자연마을이름도 누촌(樓村)이다. 부용산에 오르니 마을 사람들이 평상을 가져다 놓고 한담을 즐긴다. 관가정의 위치를 물었더니 한결같이 모른다고 한다. 마을이름으로도 남아있고, 불과 1백년 전에 편찬된 팽성읍지에도 수록된 누정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쉽게 잊혀졌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뿐이다.

객사리 자연마을 이름에는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있다. 객사리는 행정구역상으로1리(새터말), 2리(주막거리-서촌). 3리(大井), 4리(향교말, 연못뚝(동촌))로 나뉘어졌다. 교촌(校村)이라고도 하는 향교말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와 함께 "향교에 지급된 토지를 경작하던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연못뚝이라는 지명은 평택현 관아 앞에 연못이 있었던데서 유래한다. 평택객사 앞쪽 마을은 대정(大井)이다. 대정마을은 "한우물"이라고도 한다. 팽성읍지에 따르면 현의 남쪽 1리 지점에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으며,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한 샘이 있는데 "대정(大井)"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우물은 아무 곳에나 팔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샘을 파는 일 자체가 큰 역사였기 때문에 우물이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우물은 객사리 주민들에게는 생명수와 같았을 것이다. 주막거리는 조선시대에 주막이 있던 거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도로 교통망은 8大路라고 해서 8개의 큰 길이 있었다. 객사리는 한양에서 충청도 해미로 가는 6대로(大路)가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이 길에는 여행객의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하는 주막이 번성하였다. 지금도 주막거리는 객사리에서 가장 번화한 마을이지만 평택에 비하면 많이 쇠하여 옛 모습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화천역(花川驛)이 있던 마을 추팔리

역(驛)은 고려와 조선시대 출장하는 관원들이 역마(驛馬)를 갈아타거나 마차가 머무르는 여관이었다. 조선은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의 육로를 대로(大路), 중로(中路), 소로(小路)로 나누고 대로변에 역(驛)과 원(院)을 설치하였다. 우리가 사극에서 암행어사의 신표로 알고있는 마패(馬牌)는 공적인 일로 여행하는 관원들이 역마를 사용할 수 있는 증명서였다. 역(驛) 외에도 대로변에는 여관 격인 원(院)이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참점이 있었다. 참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민간인 숙박시설인 주막으로 변했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주막이 그것이다.

한양에서 평택현에 이르는 길은 남태령을 넘어 과천, 수원, 진위를 거쳐 안성천을 건너야 했다. 안성천 변 군물리(군문동) 주변에는 평택현으로 넘어가는 나루와 삽교(揷橋)가 있었다. 안성천을 건너 호치를 끼고 두리를 비껴 걸으면 객사리에 당도했다. 서울에서 이백여 리쯤 되었으니 이쯤에서 하루 유숙을 해야 하였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주막이 생겨났다. 객사2리 주막거리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1백여 년 전만 해도 지나는 길손으로 북적거렸을 이 마을은 철도와 도로교통이 인근의 평택을 중심으로 발달하면서 지금은 한적하기만 하다.

대로(大路)를 따라 설치된 역(驛)은 추팔리에 있었다. 평택현은 백제시대에 물이 여덟 갈래로 갈라지는 고을이라는 뜻에서 하팔현(河八縣)이라고 불렸는데, 추팔리의 팔(八)자도 육로교통과 관련되어 붙여졌을 것이다. 추팔리를 동네사람들은 역말이라고도 부른다. 역말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역(驛)이 설치된 지역에 흔히 나타나는 지명인데, 삼남대로의 큰 역이었던 성환역이나, 가천역(원곡), 청호역(청호리)에도 "역말"이란 지명이 전해온다. 수원을 거쳐 바삐 길을 재촉하던 파팔마가 청호역이나 가천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충청 병영이 있는 해미로 급히 달리다가 다시 말을 갈아탔던 장소가 추팔리 역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추팔리에서는 예전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최근 몇 년 동안 평택시에서 추진하는 추팔공단 조성사업으로 주변의 지형이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표지석이라도 세워놓았으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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