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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인의 삶, 애환 서린 - 안성천고구려와 배게의 싸움, 청일전쟁의 상흔 아직도 곳곳에
평택시민신문 | 승인 2000.08.15 00:00

[평택시민신문]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4

김해규(한광여고 교사)

삶의 애환이 서린 강(江)


농경사회에서 물은 흙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동양의 옛 선현들은 통치자의 가장 큰 덕목으로 치산치수(治山治水)를 꼽았다. 풍수지리적으로도 강은 산과 들과 함께 삶의 조건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분류된다. 우리의 옛 고을과 마을들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국을 하게 된 것도 농경생활과 관련이 깊다.
평택은 바다가 가깝고 저지대여서 산은 적고 구릉과 평야가 발달하였다. 그래서 좌청룡, 우백호, 주산, 안산과 같은 풍수지리적인 지형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자그만 구릉이 있으면 산기슭을 바람막이 삼아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것이 평택지방의 고을이고 마을들이다. 안성천과 진위천은 평택지방의 대 동맥이었다. 평택의 선조들은 안성천의 물을 이용해서 농경을 하고 어업과 수산업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래서 안성천 변에는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서려있다.

포(浦)와 나루(津), 조운(漕運)의 발달

안성군 삼죽면 내당리에서 발원하여 현덕면 권관리까지 총 연장 59.5Km에 달하는 안성천은 오성면 창내리에서 진위천과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흐른다. 안성천은 조선 말기까지 소사하(素沙河)라고 불렸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소사하라고 명기된 것을 보면 이 명칭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조선시대 내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산만 방조제가 준공되기 전만해도 안성천은 바닷물이 소사동 위쪽까지 역류하고, 하천 주변에는 포(浦)와 나루(津)가 발달하였다. 본래 포(浦)와 진(津)은 수로교통의 요충지로 이용되던 촌락으로 지방 군, 현의 하부 행정구역이었다. 안성천 변에 있던 포(浦)로는 군물(문)포(軍勿浦), 신덕포, 고잔포, 아산의 시포, 백석포, 편섭포, 진위천의 동청포 등이 있었으며, 이들 포(浦)와 함께 신덕포, 도두리, 신왕리, 구진, 백석포, 공세리 등에는 나루가 발달하였다. 사람의 왕래가 잦은 포와 나루에는 장(場)과 주막이 서고, 떠나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 고기잡이를 떠나는 사람,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로 북적대었다. 원평동의 화촌 마을은 신덕포를 옆에 두고, 장(場)과 나루가 발달해서 안성천에서 유명했던 마을이었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세곡(稅穀)의 운송과 대규모 화물은 조운(漕運)에 의존하였다. 그래서 수운(水運)이 발달한 내륙이나 해운(海運)이 발달한 해안 가에는 조창(租倉)을 짓고 세곡을 보관하였다가 세곡선을 이용하여 경창(京倉)으로 운반하였다. 그래서 안성천과 진위천 그리고 각 지류에는 조창이 있었는데, 군문동에 있었던 남창, 고덕면 해창리에 있던 해창(海倉), 현재의 둔포면 신남리에 있는 남창, 그리고 아산시 인주면에 있는 공진창(고려시대에는 하양창) 등이 그것이다. 조창(租倉)은 주변의 세곡을 한데 모으는 장소였기 때문에 세곡을 달구지나 지게로 운반해서 오는 사람들과, 세곡선을 타고 온 선원들(사공이나 격군) 그리고 이들을 상대로 숙식과 상업활동을 하는 상인들이 몰려들어 북적거렸다. 특히 전국 8대창에 속했던 공진창(貢津倉)은 선박수가 12척에서 25척이나 되었고, 험하기로 유명한 천수만의 험한 뱃길을 헤쳐 온 삼남의 세곡선과, 충청도 서쪽의 세곡이 모이는 창(倉)이어서 대처 중에서도 대처에 속하였다. 공진창 보다는 작았지만 고덕면 해창리에 있었던 해창(海倉)의 규모도 컸다. 해창의 규모와 중요성은 동국여지승람이나 진위읍지에 실린 지도에도 나타나며, 창내리 등 주변 지명들이 해창과 관련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조운(漕運)은 운송수단이 철도와 육운(陸運)을 중심으로 바뀌면서 완전히 쇠퇴하였다. 해창이 있던 원해창 마을도 창(倉)이 있던 자리는 농경지화되어 옛 영화의 쓸쓸함만 감돈다.

안성천에서 있었던 세 번의 싸움

강은 수로 교통에는 편리하지만 육로교통에는 커다란 장애였다. 특히 대규모 다리 등 토목공사가 어려웠던 전 근대에는 강은 절벽같은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은 강과 산이 경계였고, 국가 간의 경계도 강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안성천은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 임진왜란, 청일전쟁 등 큰 전란의 전적지였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에게 패하여 한성과 한강유역을 빼앗긴 백제가 안성천과 소사벌을 중심으로 최후의 일전을 벌이다 재차 패하여 웅진으로 천도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조,명 연합군이 철갑기병 4천으로 대규모 전투를 벌여 왜군을 무찌른 장소이기도 하다. 또 근대에는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명분삼아 출병한 청, 일 양군이 조선침략에 대한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대규모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특히 평택에는 1백여 년 전에 있었던 청,일전쟁의 흔적과 상처들이 많이 남아있다. 지금은 주공아파트가 들어선 군문동(軍門洞)은 군문포로 들어온 청나라 군대가 주둔한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망근다리라고 불리는 안성천 철교는 청군의 망군대(望軍臺)가 있던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 사건들로 격전지였던 소사동을 비롯하여 안성천 변의 민중들은 큰 고통을 당하여야 했다. "아산이 깨지나 평택이 무너지나"라고 탄식했던 민중들의 한(恨)이 가슴에 밀려오는 듯하다.

안성천 변 사람들의 삶과 애환

아산만 방조제가 준공되기 전만 해도 안성천은 천혜의 어장이었다.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곳은 고기들이 많은데, 안성천의 하류는 고기가 산란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은 사람들 중에는 봄, 가을이면 서해 각 지역에서 몰려든 흰 돛단 고깃배들이 아산만을 가득 메웠던 광경을 기억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지역의 특산물로 붕어, 게(진위현), 숭어, 붕어(평택현), 웅어(양성현) 등을 꼽는데,이 어종(魚種)들은 안성천의 대표적인 어종이었다. 계양에서 만난 박칠복(85) 옹은 아산만이 막히기 전만 해도 안성천은 "물 반, 고기 반"이었다는 말로 그 때를 회상하였다. 또 어려서부터 어업과 거간꾼을 하였다는 오성면 길음리의 김완규(75) 옹도 아산만 방조제가 생기기 전에는 숭어, 가물치, 강다리를 많이 잡았으며, 한 번 출어하면 만선을 하였다고 하였다. 안성천의 지류인 백랑천변에 위치한 평택시 합정동, 소사동에서도 참게, 조개, 갯메기가 잡혔는데, 합정동의 자연마을인 조개터라는 자연지명은 그래서 생긴 이름이다. 해산물이 풍부하면서 포(浦)에는 어선들이 입항하고 나루에는 장(場)이 서기도 하였다. 특히 원평동의 신덕포와 군문포에는 고깃배, 새우젓 배가 드나들었으며, 화촌에는 장(場)이 서서 주변에 해산물을 공급하였다.
고기는 많이 잡혔지만 안성천의 어민들은 늘 가난에 허덕였다. 고기를 잡아도 판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잡은 고기를 집집마다 나눠주고 가을에 약간의 곡식을 받아먹거나 심지어는 버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어민들은 늘 가난했다. 오성면 길음리 사람들에 의하면 3, 40년 전만 해도 하루 세끼를 다 찾아 먹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하였다.
과거의 어업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생산활동이었다. 그래서 어부들은 섣달 그믐이나 정월 대보름, 정월 초사흘 등 길일을 잡아 용왕님께 제를 올리고 뱃길의 안전과 풍어를 빌었다. 그래서 바닷가나 바다와 인접한 강가에는 당집이 유난히도 많았다. 아직도 일부 어민들이 어업에 종사하는 팽성읍 노양리나 오성면 당거리에서는 당집이 남아있고, 당제를 올리는 곳도 있다.

안성천은 평택 사람들의 삶의 밑바닥에 흐르는 강이다. 이 강은 가난한 민중들의 삶이고 숨결이었다. 고기잡이 떠난 아비를 기다리는 강 마을 아이에겐 배고픔을 잊게 하는 꿈이었고, 남도(南道)로 내려가던 나그네가 다리 쉼을 하며 나룻배를 기다리던 쉼터이기도 했다. 지금은 안성천 변에서 옛 기억을 더듬기는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안성천은 쉬지 않고 흐른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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