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제 개혁 징표 소사동 "대동법 기념비'엔 김육의 숨결이...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5

평택의 옛 길 - 삼남대로(三南大路)

김해규(한광여고 교사)


1.닫힌 길, 열린 길

지난 8.15 남북이산가족상봉을 보며 나는 한참동안 울었다. 이념의 장벽 앞에 반세기 동안 첩첩이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길이 열리는 장면은 꿈결같았다. 100살이 다 된 노모 앞에 엎드려 우는 칠순의 아들은 더 이상 빨갱이가 아니었다. 아들을 붙잡고 "같이 살어"라고 붙잡는 노모에게서 국가보안법은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남북 이산가족들이 남과 북으로 오가는데 걸린 시간은 단 50분에 불과했다. 어느 택시기사는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이 8만원이라고 했는데, 8만원의 금액이 갖는 물질적 중압감보다도 더 짧은 시간이었다.
남북 정상회담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길을 넓히자"는 논의가 활발하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표지판으로 실향민의 가슴을 애태웠던 경의선도 남북 합의에 의해 곧 복구된다고 한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버리고 다른 길이 열린다는 이야기도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국토가 우리의 몸이라면 길은 피가 흐르는 혈관이다. 길이 막히면 국토의 신진대사가 이뤄지지 않는다. 분단 반세기동안 막혔던 길 때문에 우리는 지난 55년 동안 분단의 아픔과 모순을 감내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막힌 길을 열어 내왕하게 하는 일은 통일의 여정 속에 있다.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으로 통일의 기운이 뜨겁던 지난 8월 하순, 길을 열어 막힌 혈관을 뚫는 마음으로 평택의 옛길을 찾아 나섰다.

2.이몽룡도 지나간 삼남대로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9대로 또는 10대 간선로로 나누고, 대로(大路)와 연결된 중로(中路)와 소로(小路)를 두어 사람과 물자를 유통시켰다. 이와 같은 교통체계는 국토를 인체와 같은 살아있는 생명체로 여기고, 동맥에 해당하는 대로(大路)와 정맥에 해당하는 중로(中路), 소로(小路)로 나눈 것이다.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평택은 한양에서 수원을 거쳐 성환, 공주, 전주, 남원, 통영까지 이르는 6대로와, 소사원(소사동)에서 갈라져서 평택(지금의 팽성읍)을 거쳐 충남 해미, 홍성, 보령의 충청수영에 이르는 8대로(충청로)가 지나는 길목이었다. 조선시대 평택에 관한 사료에도 이 지역을 특징짓는 표현이 교통의 요지라는 것이었다. 예컨대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에는 삼남대로가 오산신점-청호역-진위-갈원-소사-아교천-성환역을 지난다고 되었으며, 김정호의 대동지지(大同地誌)도 중미현-오산점-대백치-갈원-가천-소사점-아교-홍경원으로 연결되는 도로망을 소개하였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평택지방의 도로망을 대중적으로 알린 것은 판소리 "춘향전"이었다. 춘향전에는 한양으로 갔던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향하는 대목에, "지지대 올라서 참나무쟁이를 얼른 지나 교구정을 돌아들어 팔달문을 내닫는다. 상류천, 하류천, 대황교, 진겨골, 떡전거리에서 중화하고, 중밋오뫼, 진위, 칠원, 소새비들, 천안삼거리를 지나..."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진위, 칠원, 소새비들은 진위면 봉남리, 칠원동, 소사벌을 나타내는 지명이므로, 소설 속의 이몽룡이 평택을 지났음이 분명하다. 내가 칠원동 마을을 조사할 때 마을 노인들이 "이 길(삼남대로)은 이몽룡이도 지난 길이여"라고 말했는데, 그 주장의 근거가 이 대목이다. 최근 KBS에서 방영하는 "꼭지"라는 드라마의 무대가 평택이어서 지역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판소리 춘향전을 듣던 평택 사람들도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3.대로(大路)변의 역원(驛院)과 유적들

조선 전기 도로교통은 군사, 행정적 목적에서 정비되었다. 그래서 공무여행자의 편의와 신속한 공문전달을 위해 길을 따라 기발(騎撥)과 보발(步撥)을 두고, 역(驛)과 원(院)을 설치하였다. 역(驛), 원(院)은 통상적으로 30리마다 두었으며, 역과 원을 연결하는 역도(驛道)와 보도(步道)가 정비되었다. 평택지방에는 진위면 청호리에 청호역이 있었으며, 팽성읍 추팔리에 화천역이 있었다. 또 주변지역인 원곡에는 가천역이 설치되었으며, 성환에는 성환역이 있었다. 또 원(院)으로는 진위면 갈곶리의 이방원, 신리의 장호원, 송탄 동막마을의 백현원, 칠원동의 갈원, 소사동의 소사원이 있었다. 역원이 설치된 지역에는 국가시설물이 있었으며, 찰방 등 관리들이 배치되었고 마을이 형성되었다. 역원이 있던 마을들은 지금도 "역말"이나 "원"자가 들어가는 지명을 쓰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성환의 역말, 원곡의 역말, 칠원(院) 등이 그것이다.
대로(大路)나 중로(中路) 변에는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많았다. 그래서 전해오는 이야기도 많고, 유물이나 유적들도 남게 되었다. 소사원이 있었던 소사동 원소사 마을 앞에는 소사천이 흐른다. 이 하천은 예전에는 폭은 좁았으나 수심이 깊어서 마을 앞에 소사교(素沙橋)라는 나무다리가 놓여있었다. 이 다리를 지나 소사뜰을 넘으면 충청도의 도계(道界)인 직산 땅이었다. 그래서 교통의 요로였던 소사동에는 원(院)이 설치되고,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 곳의 장터는 소사뜰의 쌀이나 안성천과 소사천에서 잡은 생선 그리고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물산들이 거래되어 제법 성시를 이루었다. 이 마을에서 만난 노인은 "저기 빨간 지붕집이 대장간이었고, 공터 쪽이 우시장이었다"며 친절히 가르쳐주었다.
원소사 마을 북쪽 길목에는 유형문화재 제 40호인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있다. 대동법은 조선후기 민중들의 입장에서 시행한 대표적인 세제개혁이다. 이 제도는 시행 과정에서 1608년 경기도에 시범 실시된 후 전국적으로 실시되기까지 약 100년 동안 격렬한 찬반 양론과, 시행과 혁파를 거듭했던 제도였다. 그만큼 지배층과 가진자들에게 불리한 세제개혁이었는데, 이 제도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잠곡 김육(1580-1658)이다. 이 비(碑)는 김육이 죽은 이듬해(1659년) 그가 충청도지방에 실시한 대동법을 기념하여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넘어가는 길목인 소사동에 세운 것이다.
소사동에서 길을 재촉하면 성심한방병원 옆을 지나 배다리 방죽에 이른다. 배다리 방죽에 "방죽"이라는 지명이 붙은 것은 얼마 안되고 그 전에는 그냥 "배다리(舟橋)"였다. 저수지가 있기 전 이 곳은 통복천 지류를 거슬러 온 물이 역류하여 제법 폭이 넓은 물길이 있었기 때문에 배다리를 놓아 통행을 도왔다. 그러나 방죽(저수지)이 만들어지면서 뚝방이 배다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배다리방죽을 넘으면 신진자동차학원 쪽으로 난 소로길과 산직촌으로 난 소로길이 나온다. 두 길은 원곡으로 향하는 대로변과 만난다. 옛날에는 이 길로 수촌을 지나 갈원(칠원)으로 길이 나 있었다.
갈원(葛院)이 있던 칠원동은 쌍용자동자 공장이 있는 마을로 유명하다. 이 마을은 70년대 새마을운동 시절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시범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옥관자정(玉冠子井)이라는 우물이 있다. 옥관자란 조선시대에 관료들이 썼던 옥으로 만든 망건관자이다. 이 우물이 옥관자정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괄의 난 때 갈원을 지나던 인조임금이 물맛을 보고 감탄하며 벼슬을 내린 데서 연원한다. 임금께 관직을 받은 옥관자정은 그 후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지나치면 탈이 날까. 반듯한 대리석으로 꾸며진 우물에는 두껍게 이끼가 끼어 사용이 어렵다. 권위주의가 낳은 사생아 같다고 할까.

갈원을 지나면 장안동과 동령을 지나 동막으로 넘어갔다. 장안동에서 동령으로 넘어가는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의 옛 길 그대로다. 하지만 동령을 지나면서 고층아파트가 길을 막아선다. 가슴이 답답하다. 아파트 숲을 지나 아주아파트 뒤쪽으로 꺾어져서 조금가면 동막이다. 동막은 조선시대에 백현원이 있었고, 지금은 자그만 저수지를 끼고 카페가 들어선 아름다운 마을이다. 여기서 산줄기를 넘어서면 진위면 마산리이고, 다리를 건너면 진위고을의 치소(治所)였던 봉남리이다. 삼남대로는 봉남리를 지나서 견산리 야쿠르트 공장 옆으로 난 길을 넘어 수원과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한양에서 의주길로 접어들면 평양을 거쳐 곧장 의주까지 갈 수 있었다. 경의선 철도가 열리고, 대로까지 열린다면 이 길을 따라 압록강까지 치닫고 싶은 열망이 솟는다.

<역사/문화기행>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